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6-7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
자꾸 눈물이 났다. 예배 전에 감정을 추스르느라 혼났다. 마지막 기도를 할 때 저 혼자 눈물이 흘렀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묵상하며 중첩되어 울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우리에게 아이의 존재란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그냥 그러려니, 불쌍하고 가엾은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하르트만 폰아우에의 단편 서사시 <가엾은 하인리히>처럼 그리하여 병이 완쾌된다는 식이 아니다. 그저 안타깝고 딱한 이야기로 치면 예수님의 십자가만한 게 또 있을까? 나는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의 존재가 예수를 상기시킨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니 내가 누구를 위로하고 덤덤하니 의연해야 하는데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 입장이 되곤 하는 것이어서.
그러한 나의 마음에 오늘 말씀은 큰 위로가 된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아는 사람만 아는 진리다. 누가 이 고백을 감사히 받을 수 있을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고통 중의 위로라. 찬양이란 마냥 좋아서 룰루랄라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고로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이는 어찌 말로 설명하고 들려주어 남의 이야기로는 알 수 없는 비밀이다. 이와 같이 내 이야기로 날 위해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으로 귀한 것이다. 고로 나는 할 수 없어 울었다. 다만 능력을 주셔야 하는 일이지 내가 굳은 결심으로 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 일 앞에서 묵상하고 말씀을 의지하는 일이 은혜다. 모든 일은 터진 뒤의 일이다. 터지기 전의 일은 모호하고 막연하여 말만 앞서는 법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시 120:2).” 시인은 성전에 올라갈 때 이를 고백하였다. 그리고 절규한다.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3-4).”
터지기 전의 일은 남의 일이다. 남의 일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이다. 심지어 죽음에 대하여도 선생은 그래서 ‘죽음을 앞두면 나는 사라질 거다.’ 하는 멋쩍은 소릴 하는 것이다. 아직 아니라고 여기니까. 그 일은 아직 일어난 게 아니니까. 당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모든 일은 터지고 나면, ‘어찌할꼬?’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하는 말씀 앞에 섰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37).” 방법은 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38).” 부디 오늘에 일이 우리로 회개의 기회가 되게 하시기를.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죄 사함을 얻기를. 그리하면 성령을 주시리니, 이 약속은 그때뿐이 아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39).”
나는 말씀을 증거하며 울먹였다. 똑같이 마음에 찔리는데 누구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2:37).” 하고 누구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더욱 완악하고 완고하여져서 심지어 죽이려 드는 것이다. 이 차이를 바로 알 때 은혜가 크다. 그래서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0-12).” 아, 주께서 나에게도 이와 같은 기쁨을 더하시기를. 아이의 일로 단순히 감정만 치다마는 게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더욱 깊이 묵상하며.
그래서 말씀을 읽어야 한다.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이 비밀은 엄청난 것이어서 분별함으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나를 드려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를 힘쓰는 것이다. 이를 내가 어찌 내 의지로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두려웠다. 예배 마치고 같이 병원에를 다녀오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아이의 상태가 어떨지, 핑계를 댔지만 내 안의 두려움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은 좀 다녀와야겠다. 그리 주께 구한다. 그래도 어제는 ‘아빠와 엄마가 같이’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며 아이가 자랑을 했다. 약을 줄이고 바꾸느라 조금 어지럽고 기분이 이상하다고 하였다. ‘아빠와 엄마’를 강조하는 아이의 표현에서 애틋함이 느껴졌다.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그 부모의 어리석음이 너무 잔인하였다. 어린아이들은 모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이를 받고 간직하여 마음에 두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잠 2:1-3).” 찾고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4-5).” 그리하면 주께서 보호하시고 우리의 길을 보존하신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6-8).”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빛을 본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 빛이 나의 마음을 비추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부디 생각하시라. 그러면 총명함을 주신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그래서 참으며 경건하고 정결하며 사랑하고 칭찬하며 덕을 기린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우리가 이루어가는 삶이었다. 나는 울었고, 아이와 남아 성경공부를 하며 당부하였다. 네게 두시는 그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기를. 아이 일정을 고려해 아이와는 수요일쯤에 같이 병문안을 가자고 하였다. 우리에게 두신 선물 같은 기회다.
모든 일은 터지기 전에 모른다. 터져봐야 그 쓴 맛을 안다.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릴 당당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말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나는 나의 어리석었던 지난날을 고백하였고 더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은 주가 이끄시고 인도하신 이 귀한 보배 때문이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결국 그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 이 얼마나 귀하고 다행한 사실인가.
오늘의 우리 형편이 어떠하든, 그 몰골이 처지가 상황이 어떠하든,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