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 7:3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순종하기까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에 밑줄을 긋고 오래 묵상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역으로 순종한다면 더는 이 길이 어떠하든 개의치 않는다는 소리다. 이 길이 맞는지,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맞는지, 이게 아니면 어쩌지? 하는 따위의 물음에서 놓여난다. 왜냐하면 나는 주만 바라기 때문이다. 누가 내 이야기를 누구에게 했단다. 그 사람 아이가 몇 살인데 무슨 문제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내 생각이 나서 혹시 모르니 연락해보라고 했단다. 전에 같으면 왜 그랬느냐고 역정을 냈을 것이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겸양을 떨 듯 사양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오고 안 오고도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친구 누이의 딸애가 심한 우울증으로 학업도 중단하고 집에 틀어 박혔다. 또는 누가 양극성 성격장애로 자해를 하는 아이 일로 데려오네 마네 한참을 망설였다. 혹은 중2 아이가 학교 진단에서 조울증으로 상담을 필요로 한다는 결과를 받았는데, 아이엄마는 내가 목사여서 싫다고 하고 아이는 내가 더 불쌍해서 꺼려했다. 즉 이 모든 일을 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당장 올 것처럼 친구 누이는 두어 차례 통화할 때마다 울었다. 하지만 아이는 지금 상담 선생과의 밀착관계를 끊을 것 같은 두려움에 한사코 거절했다. 양극성 성격장애 아이 또한 기껏 염려하다 아이엄마도 아이도 종교적인 이유로 오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이 모든 일을 선별하신다. 나는 다만 순종할 뿐이다. 보내시는 이도 할 수 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순종하지 않을 때는 모든 게 다 모호할 뿐이다. 이 길도 맞고 저 일도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또 아닌가싶다. 순종할 땐 아무래도 상관없다. 굳이 이 길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도 그리 들린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전심으로, (우상을) 제거하고, 마음을 주께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순종에 대한 정의다. 다른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때론 이의가 생기고, 의문이 들고, 이게 아닌데 싶은 의구심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마음을 주께 행하여 ‘그만을 섬기는 것이다.’ 전심으로 말이다. 전심(全心)이란 온전한 마음이다. 온 마음이다. 오로지 한 일에 마음을 쓰는 전심(專心)이다. 그래서 이 길이 약속하신 길과 틀리다 해도 상관없다. 아,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란 그럴 수 있었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그래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어도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아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던 것이다.
아이로 인해 요즘 나는 더욱 확실하게 성경을 보게 된다. 설왕설래할 게 아니다. 순종이란 그만 바라는 것이다. 설령 군인들도 명령을 따를 뿐 토를 달지 않고, 조폭들도 시키는 것을 할 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향한 순종이면 아무려면 어떻겠나? 아! 욥의 고백이 이제는 확실해진다. 저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저를 의뢰한다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점심을 먹기 무섭게 아이가 외출을 끊고 글방으로 왔다. 약을 줄이고 바꾼 뒤 호전이 있기는 한 것인지, 나름 말도 조리 있게 하고 무언가 하려고 하는 의지도 뚜렷한 것 같다. 마치 말을 쏟아내듯 글을 무려 한 시간 넘겨서 썼고, 그 내용도 길고 풍성하였다. 물론 여전히 불안해하고 와해된 행동과 언어를 사용하지만,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다. 얘 하나로 오늘 나의 사역은 족한 것이다.
저녁이면 아내는 아이들과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누가 또 폭발하여 담임에게 욕을 하였고, 아이엄마가 불려갔다. 누구는 자신이 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더 그렇다는 듯이 행동하고 은근히 즐기듯 과장한다. 어떤 아이는 그냥 엎어져 자면서 아무리 깨우고 말려도 소용이 없고, 누구는 기어이 말싸움을 하듯 대들다 아내가 아이 등짝을 한 대 후려갈겼다. 뒤늦게 두어 명의 아이와 통화를 하고 달래고 위로하느라 부산하였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이런 애들을 백날 가르치고 뭘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길이 맞나? 하는 푸념과 회의가 일시에 올라오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종종 아내는 나보다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주의 뜻을 확신한다. 알게 뭐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돈지는 주님이 더 잘 아시는데! 하면서, 조금은 뻔뻔스럽고 천연덕스럽고 통쾌하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아이를 뭐라 하고 내 속이 볶일 텐데. 그래서 이게 내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 이 길이 정말 맞는지 안 맞는지 되물으며 어기적거릴 텐데. 아내는 이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순종이란 그런 것이다.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내가 그 정도인 것을 주님이 더 잘 아시면서 그런 일(!)을 맡기셨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 난 다만 네, 하고 그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아내의 설명도 그러했다. 그럼 그 애가 상처가 됐을 텐데, 행여 그 애 엄마가 오해를 하면 어쩌려고? 하는 식으로 내가 꼬투리 잡듯 염려를 하면, 알게 뭐야! 난 내가 할 걸 했을 뿐이야! 하는 식이다. 나는 거기서 순종의 정의를 배웠다. 모호하고 막연하고 그래서 불안해하고 회의가 들고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결국 그게 다 순종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순종은 할 뿐이다. 이 길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 결과는 어떨 것인지, 그러한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그래서 나도 전에 같으면 나 같은 게 무슨, 하면서 지레 거절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러든가! 하고 개의치 않는 것이다. 어차피 하나님이 하게 하시면 해야 할 것이고 하지 못하게 하시면 못 할 것이다.
요지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오늘 말씀이 명쾌하게 일갈한다. 주를 의지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의지하지 않으니까 자꾸 뒤돌아보고 두드려보고 다시 점검하고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우유부단함을 신중함으로 또는 그 마음에 불순종을 진지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실은 하기 싫은 것이다. 어기적거리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종하기 전에는 계속 재차 묻게 되는 것이다. 이 길이 맞나? 그런데 사실은 맞나? 안 맞나? 하는 고민이 아니라 자기 안에 싫은 마음이 우상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를 존중하고 숭배하는 게 불순종이다.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렘 28:7).” 말씀은 단호할 뿐이다. 가든가! 말든가! 성경은 우리의 자세를 교정한다.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6).” 다른 말 필요 없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내가 믿는 나의 믿음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요즘 그 허상을 배우는 중이다. 내 의지 내 노력이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그 또한 얼마나 얄팍한 속임수 같은지 모른다. 내가 여실히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나의 믿음이란 소리다. 마치 나의 확신을 무슨 보증서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내민다. 청구서 같이 말이다. 이렇게 믿었는데 왜 내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며 따지려 드는 것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하는 식이다. 이보다 더 불순한 게 없었다는 것을 내 앞에 앉아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말이 터진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하였다. 저런 애에게 기우는 내 마음이 실은 내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내의 툴툴거리는 소리도 다 그렇게 들렸다. 누가 오늘은 무슨 일이 터졌는데, 지겹고 힘들고 답답하다면서 어찌나 활력이 넘치는지! 힘들다면서 신났다. 신난 사람처럼 설명하고 떠벌이고 다시 아이와 통화하며 위로하고 다독인다.
우리가 늘 기도하는 ‘주의 마음을 주옵소서.’ 하는 말은 허상이 아니다. ‘주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하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도 그저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게 아니었다. 순종에 가까운 표현은 ‘그냥 하는 것’이다.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그 결과는 어쩌고저쩌고, 다 필요 없다. 순종할 때 길은 분명하다. 아니, 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가 하는 일이 틀렸다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내게 주시는 이 마음이 주의 마음이라! 내가 ‘저런 애’ 때문에 속 끓이고, 맘 상하고, 신경 쓰이고, 애가 타는 것이 오히려 희한한 것처럼! 다만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가는 길이 순종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러니 자꾸 군소리가 늘고 어기적거리면서 도로 미루는 것이 불순종이다. 나는 그저, 그냥, 할 뿐이다. 오늘 내게 두신 일이다! 그냥, 산다. 나의 ‘그냥’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만 신뢰한다. 어떤 결과도 선하지 않다 해도, 온통 어려움과 시련과 고통뿐이라 해도!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그냥 새벽 일찍 깨우셔서 말씀 앞에 앉히시니까 나는 묵상할 뿐이다. 이런 몸으로, 저런 아이와, 이 지경에도, 그 어떤 환경과 여건이 우리의 순종을 막을 수 없다. 순종이란 다만 묵묵히 또 무던히 더하시는 한 날의 생을 감사히 사는 것이다. ‘거기에서 살고, 그곳에서 평안을 비는 것이다.’ 아무리 이 모양 이 꼴이라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되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5).”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7).” 이 모든 게 주의 선하심으로 이루어 가시는 일이었으니,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이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