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전봉석 2019. 7. 21. 07:06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33:1

 

 

전전날부터 그러더니 어제는 앉지도 눕지도 서지도 못할 정도로 허리가 너무 아팠다. 오늘은 주일이라 아파도 예배를 마치고 아파야 할 텐데. 몸이 아프면 마음은 어려워진다. 울컥, 이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다 사는 게 참 고단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내와 딸애는 장모가 편찮으셔서 같이 병원에 모시고 가려고 아침 일찍 갔다. 억지로라도 나는 글방에 나갔다가 간신히 돌아왔다. 아프면 자꾸 서러워져 마음은 저 혼자 시큰둥하기 마련이다. 아이엄마는 주말이라 외박을 받아 집에 온 아이의 상태로 마음이 힘들었는가. 주일 날 아이를 교회에 보내지 않고 곁에서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인생은 때로 너무 가혹하고 사는 일은 너무 고단하다. 나는 뭐라 이를 말이 없으나 아이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같이 그럼 예배에 가시라 권하였다. 우리는 항상 당장의 일에 함몰되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오늘 사울 왕의 자기 합리가 어느 때보다 교활하게 느껴진다. 저는 나름 한다고 했다. 말씀에 따르기보다 당장의 이익과 현실에 따랐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삼상 15:9).” 그 판단이 실은 설득력이 있다. 그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나름은 정당한 변명이 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24).” 나는 아이 일로 아이엄마의 결정에 대해 주를 의뢰하기를. 더욱 주만 바랄 수 있기를. 아이의 이런저런 상태는 어쩔 수 없는 증상이다. 우리에겐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 아이는 우리보다 강하다. 아이는 자신의 그러그러함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우리들보다 자신의 상황을 먼저 받아들인 것이다.

 

아이엄마는 아이가 강한 게 아니라 그저 순응할 뿐이라고 답했다. 나는 그 순응이 강한 자의 것이고, 우리는 비겁하여 자꾸 타협하려 든다고 말해주었다. 그리 말해주었는데 달리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주일 날 자신이 데리고 있으면서 상태를 예의주시하고 월요일에 의사와 상담을 해야겠다며, 그러니 주일에 예배에 보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는데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누운 채로 간신히 답을 보냈고 아파서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마음과 몸과 영혼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18:25-26).” 어쩌겠나? 그 고통으로 비로소 주의 뜻을 온전히 바라고 살필 수 있기를. 저를 위해 또는 나를 위해 기도한다.

 

우상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고 미신은 하나님보다 내가 먼저 앞서는 것이다. 그게 나을 것 같다는데, 아이가 횡성수설 말이 더 두서가 없어서 그렇다는데, 새삼. 솔직히 망상은 매우 달콤하다. 내가 꿈꾸고 바라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내 뜻과 내 생각을 아심으로 언제나 나를 돕고 좋은 결과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그래서 나름 좋은 쪽으로 결정하여 그것으로 주께 경배하려 했다는데,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삼상 15:15).” 이처럼 종교적인 또는 신앙적인 스스로의 망상이 우리를 얼마나 명분 있게 하는가.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말씀보다 그게 더 낫겠다는 자신의 판단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생각했던 결과나 바라고 구하였던 데로 이끄시지 않을 때의 배신감이라니! 내가 바라던 하나님이 아니다! 그렇게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기준을 명확히 하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지만 우리가 사는 게 아니다. 내가 하지만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나는 저이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와 같이 우리 교회로 나오기가 그러면 자신이 나가는 큰 교회에라도 가서 예배를 드리시라 일렀다. 그럴수록 주를 바라고 의뢰하자고 말해주었다. 그런 말에는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내 몸이 어려워서 나에게 해주는 말이라고 받았다.

 

그렇듯 내가 생각하였던 하나님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박탈감으로 가룟인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공허와 고통과 분노와 배신감은 기어이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게 만든다. 그래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119:67).” 나는 저이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그 수고가 또는 인내가 하나님보다 앞서는 미신적인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구하였다. 종종 우리는 얼마나 위로를 원하며 사는가? 그런데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13:10).” 그러니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8).”

 

그저 자기 판단과 그 기준으로 완고할 때 하나님도 완고하게 대하실 따름이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7:2).” 나는 자세를 고쳐 않으려고 끙, 하고 신음하며 다음 구절을 찾아 주기도를 읊조려본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6:13).” 때로는 그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냉혹하고 철저하시다. 우리로 흠 없이 주 앞에 서기까지 하나님은 결코 쉬지 않으실 것이다. 저 아이의 일이나 나의 이 병약한 육신의 일이나, 우리에게 향하시는 주의 뜻을 바라게 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나는 돌아앉지도 서지도 못하겠다. 아이를 생각하다 마음이 아픈데 내 몸 하나 운신하기 어려운 주제에 이 마음은 더욱 간절하여진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33:1).”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그 기도가 간절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고통이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그러므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1).” 곧 있다 없어질 몸, 이 고통으로 인하여 주를 더욱 바람이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9:13).” 이에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35: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