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삼상 19:24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죄악 된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일은 고단하다. 언제든 기이하고 잡스러운 일로 시달린다. 왕은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고 저의 사투는 미치광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삼상 19:24).”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괜찮다, 곧 나아질 거다, 좋게 생각하라며 위로한다. 서로는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은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 3:7).”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당면한 현실에만 전전긍긍한다. 하나님도 동의 없이 저를 도우실 수 없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나는 어찌 아뢸 길이 없어 몸도 마음도 아픈 날이었다. 아이는 전날부터 어떤 약을 새로 처방받아 시도하고 있는데, 그 부작용에 대해 찾아보며 마음이 어려웠다. 그러니 그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그럼에도 서로 그저 다 잘 될 거야! 하고 위로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더 가야 주 앞에 자복하며 통회할 수 있을까? 아이와 카톡을 하고 통화를 하며 대신 지고 가는 아이의 고통이 느껴졌다. 원래 우리는 이렇게 살자고 지어진 게 아니다. 세상을 그렇게 주신 게 아니다. 어쩌다 이리 된 것일까? ‘그들의 행위는 그 땅을 더럽혔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겔 36:17).”
오늘 우리에게 벌이지고 있는 이 일은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일이다. 죄의 문제다. 아이의 일이 아니라 그 고통으로 하나님은 나를 좀 보자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엄마는 그를 담당하는 의사와 마지막으로 써보는 약과 그 효능과 부작용에 대해서만 몰두한다. 대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뭐라 한들.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고 근황과 예의바름과 적당한 선에서의 할 도리로 족한 줄 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지! 자신을 돌아보아 주 앞에 자복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없는가? 하나님도 동의 없이 누구도 그 마음에 들어가지 않으시는데 하물며 내가 어쩔 것인가? 아침에 묵상하였던 말씀 구절을 적어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인사를 대신하였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울어야 한다. 우리의 눈물은 회개다. 돌이켜 주 앞에 통회와 자복이 없이는 이 시점에서 저마다 청맹과니일뿐이다. 형은 형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저 안타까움에 꺼이꺼이 한숨지을 뿐 정작 아이가 몸부림치며 붙들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그의 지으신 세계에 대해서는 아랑곳도 않는다. 어쩌면 좋을까?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느라 연달아 진통제를 맞고 물리치료를 하고 돌아왔다. 도대체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우리가 어찌해야 할까? 시인은 역설적이게 노래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시 137:9).” 그 소중한 장래의 소망을 깨부숴야 한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문제를 걷어차야 한다. 온 나라가 세계가 난리다. 사회가 가정이 아이들 하나하나가 미쳐가고 있다. 그런데도 다들 평안하다, 괜찮다, 다 잘 될 것이다, 하며 거짓 위로로 당장을 모면하려 든다. 더 큰 재앙이 오나니.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막 13:7).”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언제든 준비된 자로 기다려야 한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 25:3-4).” 반드시 때가 이를 것이다. 다만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어, 누구는 너무 그러지 말라는 투로 완곡하게 혀를 찬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말하면 다음 말이 없다. 대체 어떤 위로를 원하는 것일까? 한 번도 말씀 앞에 아멘으로 대답할 줄 모른다. 오히려 거북하게 여긴다. 그리고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려고 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만 고심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 말을 이을 길이 없다. 삶만 고단하다.
우리는 다만 그 말씀을 삼킬 뿐이다. 속된 말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주가 알아서 하실 일이고,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3).” 말씀 붙들고 힘내세요, 하는 말이 무슨 위로가 될까. 저는 의사를 믿고 나는 저를 부리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날 봐도 알지만, 사람 참 질기다. 죽기까지 놓지 않는다. 자기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그것으로 말씀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뒤로 한다. 나는 점점 해줄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인다. 잠자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을 바란다. 내 몸뚱이 하나 어쩔 수 없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주장할 수 있겠나? 나는 여기 하나님이 놓으신 자리를 지키기로 하였다. 할 수 있는 정도에서 해야 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기를.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것. 돌아가는 세상을 봐도,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봐도, 경고다. 황폐함에 놓여질 수 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8).” 그러니 어쩔 것인가? 기를 쓰고 더욱 악착같이 살아낼 것인가? 그 고집으로 이를 악 물고 버텨볼 것인가?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다들 입만 살아서 제 말이 옳다 한다. 제 생각이 그르지 않으므로 그것을 뭐라 하는 자는 적으로 돌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스르심을 보이실 것이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6-27).” 그러니 다만 말씀만 붙들자. 내가 나를 위로할 것도 없다. 어찌 다스려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아이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맛보아 알게 하시려는가? 며칠째 나 역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죽을 지경이다. 지금 오시면 안 돼요? 하는 아이의 말에 마음이 미어진다.
그래도 평강이 있다고 하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겔 13:10).” 정신 똑바로 차리자. 비로소 나는 알았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아픈 몸은 거드름 떠는 영혼의 뺨을 갈긴다. 따귀 맞은 영혼은 정신이 번쩍 들고 정신 차려야 한다. 나는 주를 바랄 뿐이다. 사울이 왕이면서 보이는 그 꼬락서니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 수만 있다면!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롬 9:9).” 우리의 무던함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혼자 두시면 혼자 있는 시간에, 누가 같이 있으면 저와 함께, 누구를 뭐라 할 거 없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두시는 마음으로 주시는 삶 가운데서 무던히 말씀 따라 가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오늘의 눈물은 온당하였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 그리하여 속죄란 하나님의 절대적인 용서로 인함이다. 나의 수고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주만 바라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2:17).” 반드시 주님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서도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