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전봉석 2019. 7. 27. 07:13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2-13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살아서 사는 날 동안 생을 다하는 것이 충성이다. 그 처절함에 대하여는 오늘 다윗의 모습이 생경하지 않다.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에 저에게 광야란 살아서 생을 다하며 하나님을 우러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한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물음 앞에 우리의 연약함은 불편하기까지 하다. 종일토록 장대비가 퍼붓는 날이었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는데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힘들었다. 앉았다 서성거리다 섰다 또 창밖을 보기도 하면서, 산다는 일에 대해 생각하였다. 이파리는 나무를 위하고 열매는 남을 위한다. 나뭇잎만 무성한 나무에 대하여는 예수께서 지나시다 나무라신 일도 있다(11:4). 작가는 대놓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고 묻는데, 우리의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7:18).” 자기를 위한 열매는 없다. 남을 위하지 못하는 열매는 그 자리에서 떨어져 썩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19).” 그래서 에스겔은 묻는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15:2).” 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정리하셨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20).” 과연 오늘 나의 열매는 어떤가? 억수로 퍼붓는 장대비를 내다보며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사는 일이란 그 일 자체로 숭고한 것이다.

 

누가 묻기를 어떤 일에 있어 죄의식이 들고 자책이 일어 이대로 사는 게 맞나? 이렇게 그냥 가도 되는가? 하며 괴롭다고 하였다. 그처럼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사는 게 일이다. 산다는 건 맡기신 바 그 생을 다하는 것으로 그것을 맡기신 이에게 충실하는 것이다. 어느 훌륭한 목사가 있었다. 저의 설교나 목회는 모든 이에게 덕이 되었다. 한데 저에게는 끔찍한 죄의식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저의 안에 음욕이었다. 그것도 유난히 설교하러 강단에 오를 때면 음란한 생각이 항상 그를 괴롭게 하였다. 또 누구는 젊을 때부터 피우던 담배였다. 주의 성전이라 하며 그 몸에 대하여 설교하고 묵상할 때마다 찔리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책이나 죄의식으로 돌아서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부끄러움까지도 치열하게 다투고 싸우면서 주가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는 일이다.

 

오늘 본문은 처절하기 그지없다.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삼상 21:12-13).” 차라리 그럴 바에는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생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절규한다. 나는 아이엄마에게 두 번이나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교회가 병원비 일부를 감당하는 데 있어 이를 전해주는 게 쉽지 않았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것 또한 교회의 사명인 것을 설명하고 싶었고 이를 자존심 상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양하고 거절하다 계좌번호를 알려주었을 때, 뭐랄까? 어떤 기쁨! 누가 보면 준다는 사람이 더 사정을 하는 기이한 일인 것 같은데, 문득 나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조금은 맛보아 알 것 같았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39:14).” 주시는 이가 주고자 하여 그 마음과 정성과 온 몸을 다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기까지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기어이 고난당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80:12-13).” 내 안에 이는 서운함과 원통함을 들먹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119:67).” , 왜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지.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140:12).” 비로소 그 고난으로 주를 알리시는 거였다. 고난이 없이는 복종도 없다. 그러다 나는 아이엄마가 이해하며 계좌번호를 적어주었을 때 알 수 없는 기쁨에서 얼른 교회 통장에서 생각하고 있던 금액을 탁탁 털어 보냈다. 그때 쉘 실버스타인의 그림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연상했다. 우리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려는 것이었구나.

 

얼마나 우리의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있는지.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3:7).” 나는 전 시간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 다 전하지 못하였던 말씀에 더해 <하나님의 섭리>를 보강하였다. 섭리란 이 모든 지배의 원리다.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의도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우리의 상상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굳어진 우리의 영혼을 돌이키기 위하여,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20).”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게 있을까? 그러할 때 시인은 하나님을 묵상하다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39:13).” 나도 이제 조금은 그와 같은 고백을  알 것 같고 내 것으로 가지고 싶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5).”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나는 그와 같은 실제를 살면서 생을 다하기까지 알아가는 중이다. 왜 내게 장애를 주셨을까? 기형적인 몸뚱이로는 고통을 가져오고 그로 인한 괴로움과 고통은 나를 몰아세우기 일쑤인데, 기이하게도 그것으로 나는 누구의 아픔과 그의 절실함을 공감한다. 너로 인해 내가 아프다는 거! 감히 내 입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겠으나, 주님의 심정이 어떠하실 지는 이제 분명히 알겠다.

 

가령 누구에게 들려주었다. 아파서 어떡해요? 하는 저의 염려에 대해 아픈데 아픈 나의 몸이 실은 주의 것이라! 그렇다면 주님도 아프신 일인데, 그 아픔을 주님은 어찌하실까? 그것으로 이루시고자하는 것이 곧 섭리였다. 비록 나는 나의 아픔 중에 그걸 다 알 수는 없다고 하지만 분명히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그 뜻을 이루실 것이다.’ 아이엄마가 용기를 내어 계좌번호를 알려주었을 때 나는 기쁨으로 그리 답을 하였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139:6).” 오늘 시편의 말씀이 구차하고 한심하기까지 한 다윗의 생을 놓고도 찬송하게 하신다. 미친 짓을 하면서까지 생명을 구걸하는 듯하나 우리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

 

너무 쉽게(?) 목숨을 끊는 이 세대의 탁월한(?) 선택 앞에 오늘 말씀은 너무도 무섭고 엄중하게 들린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8).” 단지 죽음으로 그 끝이 전부가 아닐진대,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9-10).” 다시 말해 구차하고 빌어먹을 인생으로 구질구질하다 해도 그 모든 생은 살아서 사는 것만으로 엄연히 귀하고 소중한 사명인 것이었으니. 저들이 때론 조롱한다.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삼상 21:14).” 그러느니 뛰어내려 또는 목을 매고 아니면 물에 빠져 죽는 게 더 나은가?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15).”

 

다윗은 이와 같은 수모와 고통 가운데서도 살아냈다. 그것은 구질구질하게 생명을 더 연장하려는 구차함이 아니라, 그와 같은 수모까지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이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31:23-24).” 저의 고백이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인가? 내가 이런 세상에서 어찌 더 살아야 하나? 두려움이 엄습하고 수치심과 죄의식에 사로잡힐 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우리 주님께서 다 이겨놓은 세상일 뿐이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당당해도 되는 이유였다. 담대할 이유가 있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139:1).”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3-4).” 그러므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