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삼상 23:16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편 141:9
요나단과 다윗의 사이가 참 근사하다.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에게 더욱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는 사이라니! 요나단은 요나단대로 다윗은 다윗대로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데서 묵상을 시작하면 참 기이하기까지 하다. 성경은 그렇게 종종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바울 사도의 자백도 그렇고,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 그러할 때에 거친 숨소리로 주께 아뢰는 일도 그렇고,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2-13).” 그럼에도 주의 선하심에 대하여 확신하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오늘 아침, 요나단과 다윗의 만남이 나에게는 그리 읽힌다. 그럴 수 없는 데서 그러하기까지의 이야기,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8).”
여든네 살의 노모의 생신을 축하하고 아내는 함께 휴가를 떠난다. 어느 인생이 안 그럴까만 참으로 기구하고 고단한 생을 사셨다. 돌아보면, 오늘에 이르러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 앞에 감사와 경배를 올릴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큰 기쁨이 있었더라.’ 달리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미신을 섬기고 온갖 잡신을 숭배하던 생이었는데,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돌이켜 보면 참으로 우리네 인생 또한 기이하다. 늙으신 나의 장모는 이를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였다. 그러니 생을 다하며 산다는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신주단지를 섬기는 집에서 일찍이 과부가 되어 허접살림을 다 건사하던 때에 하나님은 차근차근 이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성취하고 계셨던 것이었으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개별적으로 나의 지나온 날들도 놀라운데 곁에 선 사람들의 고백 또한 신기할 따름이어서 요나단과 다윗이 서로에게,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하는 말씀 앞에서 나는 먹먹할 따름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새삼 이 놀랍고 감사하고 귀하고 경이로운 느낌으로 오늘의 이런저런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을 다시 돌아본다. 아이는 상태가 어떠한지, 주일예배에 보내지 않았고 우리는 기도 때마다 저의 이름을 주께 아뢰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라! 이게 무슨 큰 힘이 되겠나싶지만 그 힘으로 돌이켜 나는 기어이 주의 종이 되었고, 온갖 미신으로 숭배와 숭상에 시달리던 처가는 믿음의 가정이 되었다. 손수 신주를 모시던 노모의 손길이 이제는 주께 아뢰는 기도를 적어 올리게 되었으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9).” 그저 늘 당장 처한 상황에 쩔쩔매기 일쑤고 때론 원망과 좌절과 낙심으로 안 믿는 자보다 못한 신앙으로 투덜거리기 일쑤인데도, 하나님이 다 하시었다. 그러므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시 141:9).” 오늘의 어느 것 하나도 그와 같은 증거가 아닌 것이 있겠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두고 자녀들이 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현실 앞에서 나는 놀라워하였다. 나 같은 게 그러고 있다. 외골수 형님이 주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어머니의 입으로 주의 영광과 찬양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결국은 구원을 받음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고 기이한 느낌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았다. 비록 지금 아이의 사정이 또는 그 증상이 어떠하다 해도 그러한 사실을 능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왜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지 이제는 알겠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죄인 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께서 어찌 관여하시고 인도하시며 그 모든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을 바꾸어 선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다만 우리는 주께 아뢰고 간구할 따름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141:1).” 곧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2).”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3).” 오늘의 내 입에서 주를 찬송하고 주께 감사하는 소리들로만 채워지고 합쳐지기를. 행여 당장의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좌절하고 쓰러져 넘어져 있지 않게 하시기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이에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시 14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