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삼상 27:6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 땅 시글락으로 은신하였다.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체 하며 목숨을 부지하였고(21:10-15), 이로써 아기스의 신임을 얻었다. 아기스는 더 이상 저를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았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 땅을 내어주고 다윗은 그곳에서 1년 4개월을 살았다(27:5-6). 다윗은 그동안 그술 땅을 치고,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다. 아기스 왕은 저가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것으로 알았다(10).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12).” 다윗의 처지와 처세가 기가 막히다. 그럼에도 저는 찬송하였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 구원을 결심하신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온전히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했고 그의 성품으로 영광을 누리셔야 했다. 나는 요 며칠 이 말씀에 꽂혔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겔 36:21).”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아끼신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하는 마음은 어찌된 것일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너무 감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위주로 마치 나를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셔야 할 의무가 창조주께 있는 것처럼 마땅히 여기던 마음이 교만이 아니겠나? 나 같은 게 뭐라고?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서 나는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 나의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주의 이름을 위해서도 나를 다시 건지시고 이끌어서 오늘에 다시 세우셨다는 말씀에 안도하는 것이다. 내가 주체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안심이다.
점심시간에 맞춰 아이 병원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비가 억수로 퍼부어서 운전하는 데 긴장하였다. 같이 설렁탕을 먹고 차를 한 잔 마셨다. 약물을 다시 조금 높인다더니 전날과 달리 아이의 언어 구사능력은 무난하였다. 점심을 먹고 올라오자 병실에 또래 청년들이 대부분이어서 놀랐다. 한 아이는 오늘 퇴원한다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친근하게 말하였다. 아이 부친으로 보이는 이가 오자 아이가 긴장하였다. 보니 그때까지 밥을 먹지 않고 식판을 앞에 두고 있었다. 저는 다그치며 뭐라 했다. 아이는 무안한 듯 식판을 끌어다가 수저를 들었다. 모두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게 강박이냐? 다 식었잖아? 퇴원해도 되겠어? 아예 더 있지 그래? 여기가 좋지 않아? 집에서 잘할 수 있겠어? 간간히 아이 부친은 대답 없는 아이를 향해 일방적으로 다그쳤다. 이게 참!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그 부모의 이상함이 드러난다. 선하게 생긴 아이가 자꾸 내 눈치를 보았다. 아이는 아빠에게 나를 목사라고 소개하며 친근감을 보이려 했던 게 어색하게 되었다. 나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오는 길엔 또 네비게이션을 잘못 봐서 엉뚱한 길로 돌았다. 글방에 들어서자 녹초가 되어 소파에 눕기 무섭게 잠깐 잠이 들었다. 처가 쪽 누구네 둘째 애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아파트가 여덟 채고 자신들이 사는 게 몇 평이며 상가도 두어 개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애만 다시 온전해질 수 있다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겠냐고 말한단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실제 그럴 마음도 없고 그럴 거라고 믿지도 않으니까 그런 소릴 하는 게 거짓말이다. 애가 연대를 갈 정도였으니 수재라. 듣자하니 아이 아빠가 그리 몰아세우며 아이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꽥꽥거리는 모양이었다. 요즘은 아이 때문에 어디 교회에도 나가고 거기서 만난 상담의사와 친분을 쌓으며 아이가 조금은 좋아졌다고 하였다. 그게 그런데, 하고 나는 아내에게 뭐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저마다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다. 마땅히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소릴 해댄다. 정작 하나님 없이 살고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서도 요구와 필요에 따라서는 그리 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의 인자하심이 선한 길로 인도하심에 대하여 나는 놀란다. 우리가 죄로 더럽힌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서도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논리 앞에 나는 갑자기 든든하였다. 나의 수고나 어떤 열심이 그 조건이 아니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 앞에 겸손히 엎드릴 뿐이다. 내세워 요구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비통한 심정으로 다윗의 기도를 읊조릴 따름이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쓸모없는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니 이를 아는 것이 복되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
다들 저마다의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 아파트가 몇 채면 뭐하고 돈이 산더미처럼 많으면 뭐하나? 장사가 잘 돼 돈을 갈고리로 끌어 모은다 한들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가족들 돌볼 여력도 없고 자식새끼 건사할 기력도 없으면서,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들 주술을 외운다. 누가 말하길 더 늙기 전에 이제 좀 쉬면서 노년을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저야말로 강박이다. 죄의 강박은 쉼이 없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그저 죽을 때까지 개처럼 벌 뿐이다. 그 돈이 다 헛되다. 마음에 병든 아들은 이십대 꽃다운 나이를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홀로 보낸다. 저를 위해서도 돈돈거리며 기력이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걸 마치 부모의 책무로 알고 열심이다. 그 열심으로 모두가 병들었다.
나는 아내에게 당부하기를 우리 애들 이만큼 바르게 키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생은 더욱 주만 바라며 살자. 행여 어디에 누가 무얼 같이 하자는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순간 더해지는 재물을 바라지도 말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우리가 한 게 없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사는 게 일이 아니다. 사는 날 동안 주를 우러르며 주의 거룩하신 이름만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삶이 가장 복되다. 미치광이처럼 떠돌면 어떻고, 이방 나라에 은신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생이라도 어떤가? 그 하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주의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우리의 삶에서도 이루어지시기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수상하다.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시 78:36-37).” 세상에 헛물켜고 살지 말자. 사람들처럼 사는 게 복이 아니다. 평범한 삶이 저주다.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하는 게 죄의 늪이다. 수렁이다. 그곳에서 건짐 받은 우리로서 더는 허튼 데 마음 두지 말자. 나는 처가 쪽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혹시나 하는 마음도 없다. 행여 당신도 자기 몫을 운운하며 껴들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엄연히 저들과 다르다. 달라야 한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계의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자. 가정예배에 앞서 딸애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나의 당부는 간간이 이어졌다. 다들 잘 먹고 잘 살라 해라. 우리는 이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지난날 나의 잘못과 죄악을 주께서 담당하셨으며 이는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데 나는 평안하다. 마치 내가 얼마쯤은 갚아야 하는 채무가 아니다. 신앙의 부채감보다 어리석은 등짐도 없다. 아이엄마는 자꾸 폐 끼치기 싫어서, 하는 소리를 예의바르게 하곤 하는데 말이 그렇지 그게 다 죄다. 이 모든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냐 아들만 다시 온전해질 수 없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한 누구 엄마의 말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저 자기 입바른 소리에 사탕발림당할 뿐이다. 죄는 능청스럽다. 악은 그 허우대가 멀쩡하다. 괴물 같이 뿔 달리고 혐오스러운 게 아니다. 극진히 예를 갖추고 점잖을 떤다. 돈이 곧 교양이다. 없던 교양도 절로 생겨난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우아한 영혼'은 없다. 다윗의 비루하고 처절함이 우리 믿는 자들의 현실이다.
그러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다들 곧 환갑이고 이제 누구는 낼모레면 칠순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건재함을 자랑한다. 그 평생에 모은 걸 어찌 두고 갈까? 우리는 다만 다윗의 기도를 함께 읊조릴 따름이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시 144:1).” 내가 감히 누구를 싸워 이길 수 있겠나? 다만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2).” 주가 행하심이다. 그러니 쫄릴 거 없다. 나는 무얼 잘하려고 의무감에 더는 행하지 않는다. 마음에 주시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뿐이다. 그것도 순 엉터리지만,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 그렇지! 나는 다만 하나님을 나의 주를 의뢰할 뿐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