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삼하 3:33-34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다윗의 성정을 엿볼 수 있다. 저가 악하였다 해도 저를 애도할 수 있는 다윗의 품성이 넉넉하다. 이는 시편에서 그 이유를 정의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하나님의 주권을 아는 것이다. 나서서 자신이 판가름할 일이 아니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서 꿋꿋하게 주의 길을 갈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다. 나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는 것.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 12:1).” 곧 곤고하고 어두운 날에 이르러 우리를 붙들 수 있는 한 가지는 믿음뿐이다. 무릇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 것. 사람들이 주장하고 내세우는 일이 아니라는 것.
종일 무덥고 바쁜 하루였다. 병원에 가면 온통 아픈 사람들이라. 저들의 우환이 얼굴에 가득하다. 설마, 하던 일이 벌어지고 급기야 고통으로 힘에 겨울 때에 돌이켜 주를 뵐 수 있는 기회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러니 때가 아직 이르기 전에 주를 찾는 것,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복이다. 하루아침에 덜컥, 더는 못 일어나는 게 인생이다. 나는 몸져누운 장모와 그 병실에 있는 노모들의 고단한 육신의 모습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중하지 않으니 당장 퇴원시켜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자식이 둘이나 있고 며느리에 손자들이 줄줄이 장성하였다 하고 가진 재물이 없지 않다고는 하나, 인생 참 별 볼일 없는 것이다.
한때는 다들 여유로운 법이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9-10).” 어느 날 덜컥, 말 그대로 ‘도둑 같이 오리니’ 우리의 최선은 우리의 착한 행실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착한 행실이 주가 아니라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게 그 목적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결과는 주의 것이다. 다만 나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행여 이 한 날의 수고가 또는 고단하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를 노엽게 한다 해도, 이 또한 주가 주도하시고 그 배후에 계심을 인정할 때,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는 일이 중요하다. 그저 벌어지는 현상이 다가 아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일을 이루어가고 계시는가, 하는.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돌이켜야 한다. 돌아와야 한다. 오후께 사장이 건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갔다. 누구 말도 들을 수 없는 자신의 말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은 형국이라. 나는 종종 저들과 이야기할 때 금세 환멸을 느낀다. 사람이란 그처럼 자기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이구나 싶다. 행여 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묵묵히 듣기만 하는 것도 일이다. 누구 뭐라 할 거 없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렘 4:14).” 저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함께 하실 것을. 그래서 나는 대체로 사업가들과 장사하는 이들의 입바른 소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앞서 자신이 했던 말을 금세 잊어버린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모른다. 돌이켜 그 말을 되새길 수 있는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장모를 옮겨야 할 요양원과 병원을 알아보다 지쳤다. 돈이 있다고 다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다. 그리고 다들 꽉꽉 찼다. 온통 다 병든 사람들이다. 어쩜 그리도 가득할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저녁에 병실에 들러 함께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면서 더는 갈 곳이 없다면 우리 집으로 모시자고 하였다. 차라리 그게 낫지 싶다. 천지가 요양원이고 병원들인데 갈 곳이 없다니! 삶이란 그처럼 빛 좋은 개살구 같아서 건강하고 조금은 운신할 수 있을 때는 모른다. 그러니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돈도 가족도 명예도 지위도 무슨 소용이 있나? 이미 죽었던 우리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왜 말씀뿐인가 알겠다. 어떠하든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 아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다른 무엇을 의탁하며 의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장은 돈 많고 출세하고 좋은 차를 타는 게 성공이라고 되뇌었다. 뭐라 한들 들릴 리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련의 상황들을 접하면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내 안에 주를 의뢰하는 힘이 있는지? 고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말로나 생각으로, 의지나 굳은 결심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그러니 오늘 내게 두시는 육신의 고단함이 일이라. 아픈 게 나의 한 날의 수고인 것으로, 곁에 두시는 이런저런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를 더욱 의뢰하게 한다. 사람 볼 거 없다. 되는 현실도 허상이다. 온통 다들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 병실이 없어 나가라, 하는 병원과 돈은 있으나 갈 곳이 없는 처지에서 다들 그 꼴이 우습기만 하였다. 하나님을 시인하나 부정하는 삶이란 그리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꼴이 아니다. 우아하고 대견하고 열심을 다하며 성실한 삶으로 나타난다. 그 와중에 사장이 건너와 저의 이런저런 자신감과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알겠더라.
오늘 말씀이 그 진리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아침나절에는 뜬금없이 옆 사무실 노인이 건너와 대형교회 세습을 어찌 생각하는가 물었다. 저의 질문은 자신의 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라 굳이 내 말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세습이 나쁜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와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와 권세가 문제인 게 아닌가, 되물었다. 가령 나는 오늘 내가 감당하는 일을 아들이 뒤이어 감당하며 주를 바라기를 소원한다. 하다못해 어디 맛집도 어떤 가업도 대를 이어오면서 지키면 이를 장인이라 일컫는데, 유난히 교회 세습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의 이목은 정작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린 저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려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곧 말씀 붙들고 말씀만 의지할 따름이다(1-2).
이러니저러니 다들 제 말에 겨워 너풀거리는 인형 같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한데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모저모 여러 형태의 일들이 곧 다 교훈이다(3-4). 스스로 장담하는 일들의 허무함에 대하여는 더는 뭐라 할 것도 없다. 부화뇌동하여 언론에 끌려갈 일도, 사람들의 이목에 집중할 일도 아니다. 다만 저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5).” 이와 같은 말씀의 엄중함 앞에 입 다물자. 묵묵히 주만 바라며 주신 하루의 날들로 그 무게에 족하였다. 다만 모든 결과는 주의 것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