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전봉석 2019. 8. 10. 07:02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삼하 4:10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시편 2:2-3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에 나서고, 없어도 되는 것을 소유하며, 쓸데없는 질문에 휘말릴 때 사탄은 이를 악용하여 우리 마음을 굳어지게 한다. 완고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알되 감동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가 없으며, 기어이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남이 와서 채가는 데도 알지를 못한다. “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13:19).” 그러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0-21).”

 

이와 같이 완고한 마음을 주께서 제하여 주시겠다는 말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36:26).” 그렇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 누가 내게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에 개신교 목사로서 답을 좀 해줄 수 있냐고 하였다. 전에 이병철 회장이 어느 신부에게 던진 질문이라 했고 이를 각계각층의 철학자나 학자들이 답을 하여 책을 낸 것이라 하는데, 나에게는 저들 답은 개의치 말고 오롯이 목사의 입장에서 답을 좀 해달라는 개인적인 부탁이었다. 인터넷에서 22개의 질문을 찾아 훑어보았다. 그런저런 의문이 들 만한 내용이었다.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어서 답을 작성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뤘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이와 같은 여러 질문에 시달리는 그 자체가 마귀의 술수겠다. 정작 여러 질문을 퍼붓고는 아무리 그 물음에 답을 해주어도 들으려하지 않는 속성이 완고함이다. 어차피 자신의 의문을 답보다 굳건히 믿고 있는 것이어서 아무리 정답을 일러준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6:31).” 지옥에 있는 부자가 죽은 나사로를 보내어 아직 죽지 않은 형제들에게 답하여 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의 대답이다. 어쩌면 저들은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완고함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하는 의문일 뿐이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4:7).” 이를 그렇듯 아니할 수 있는 것이 은혜였다. 뭐라 한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2:7).”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감동도 감화도 없는 것이면 돌 위의 씨앗이고 아스팔트 위의 낱알에 불과할 것이다. 그냥 그대로 있어 뿌리를 내릴 수 없고 그러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낚아채가기 십상이다. 그러니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3:12).” 성경은 누누이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

 

나더러 어찌 이를 증명하겠나? 하고 물으면 나야말로 답이 없다. 늘 일상에 펼쳐지는 주의 손길과 그 섭리 가운데 놀랍고 감사하다, 힘들고 슬퍼서 기도하다 기뻐한다. 가령 어제만 해도 암담하였다. 전날에는 포기하였다. 나는 건물마다 요양원도 많고 요양병원도 여럿이라 돈만 있으면 아무 때나 모실 수 있을 줄 알았다. 병원에서야 방침에 따라 골절에 의한 입원이니 하루 속히 퇴원하라 하고, 그러니 알아본 결과 어쩜 그리도 까다로운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아내와는 우리 집으로 모시기로까지 결정하였다. 어쨌든 꼬리뼈에 금이 갔으니 붙을 때까지는 누가 지켜야 하고, 노인이라 근력이 쇠진할 테니 어쨌든 재활 치료를 하긴 해야 하는데. 아침에 병원에 들러 장모를 살핀 뒤 우린 혹시나 하고 어제 한 번 와보라 했던 교회 옆 건물 요양병원을 가보기로 하였다. 나는 되든지 안 되든지 이번에는 의사 소견서뿐 아니라, 전 병원 전전 병원의 진료기록까지 다 들고 가자고 하였다.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에 좋은 게 치매나 말기 암 환자들 수용보다 노인성질환이나 투석, 재활을 목적을 하는 요양병원이었다. 한방과 물리치료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한데 상담하는 이의 첫 마디가 자리가 없다는 거였다. 우선 대기자 명단에라도 올릴 요량으로 어머니에 관한 진료 기록을 모두 내어주었다. 저들이 잠시 그것을 검토하는 동안 아내와 둘이 남아, 어쨌든 그럼 다음 주까지 여유가 있으니 지금 있는 병원에 더 계시다가 우선 우리 애 방으로라도 모시자고 위로하였다. 아내는 시무룩하여 울상이었다. 어제도 욕심이 나던 요양병원이 있었는데 시설도 좋고 다 좋은데 너무 치매환자나 중증 노인들 위주라, 의사 소견서만으로는 어렵겠다는 말에 다행이기도 하였다. 심란하게 앉아 기다리는데 상담하는 이가 들어오더니 자격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딱 그 순간 여성 병실의 한 노인이 주말에 퇴원을 하겠다고 가족들이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월요일에 그 자리에 들어오시겠냐고 물었다!

 

그러려고 하나님이 그리하셨다. 나와 아내의 결론이다. 안 되었으면? 것도 또한 그러려고 하나님이 그리하셨다. 어떠하든 하나님이 그리하신다. 완고함의 반대는 순응이다. 받아들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기쁘면 찬송하고 슬프면 기도하면 된다. 솔로몬의 말처럼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게 두셨다. 이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신앙은 그렇듯 복잡할 게 없다. 쓸데없는 질문에 휘말리지도 않는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너희 마음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가격도 여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 한 달 치 비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또 바로 집 근처고 우리 교회 옆 건물이라 감사하였다. 늘 다리가 시리고 저린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니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설이었다.

 

저녁에 예배를 드리러 가서 장모에게 그 일련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몇 곳 사진을 찍어서 보여드리며 안심시켰다. 손위 처남이나 가족들은 좀 더 두고 보자는 말로 우유부단하였으나 우리는 그리 되어지는 일에 대해 하나님이 그리 하신다는 데 확신하였다. 안 되어도 잘 되어도, 우리 뜻과 달라도 혹은 우리 뜻대로 되었다 해도 이 모든 배후에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데 우리는 더 이상 이의가 없다. 굳이 누구에게 증명할 것도 없고 나서서 내가 어찌 일처리를 하려고 나설 문제도 아니다. 다만 일이 꼬이면 꼬이는 대로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장모의 손을 잡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한 뒤 돌아오는데 아내의 입에서 저절로 감사가 터져 나왔다. 안도의 긴 한숨도 내뱉었다. 말이 쉽지 방 두 개짜리 집에서 딸에 방에 운신도 못하는 노모를 모시고, 것도 낮에는 거실에서 아이들 수업도 해야 하는데, 저녁에 아이 잠자리는 어쩌나 하면서, 그리 되면 우리가 저녁에는 거실에서 자고. 하면서 그저 그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라 여겼는데 하나님이 또 이와 같이 기적을 베푸셨다.

 

나는 누가 기적을 운운하며 이를 신비화할 때 저가 우습다.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은 그 자체로 나날이 기적이다. 신비다. 주의 영적인 보호하심과 도우심의 연속이다. 어느 것도 아닌 게 없다. 그러니 이 일을 어찌 질문지에 답을 하듯 기승전결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어차피 또 그런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더러 저들의 완고함은 자신들도 안 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깨부숴 맑은 물로 정하게 하거나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36:25).” 아니면 그냥 그대로 그 돌 위에 놓인 말씀은 천년만년 그대로 저와 성관 없는 것일 테니! 오늘 우리의 순응이 순종이고 순종이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이었다. 육에 속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영적인 분별은 불가능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마음에 느껴지지도 않는다면...

 

오늘 말씀도 괜한 일에 열심인 이들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그려준다.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삼하 4:10).” 안 나서도 될 일과 굳이 안 해도 될 일에 휩쓸리지 않는 게 지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분별이다. 그러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2:2-3).” 그 어리석고 수고스러움에 대하여 할 말이 없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1).” 이를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4).”

 

우리는 다만,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8).” 말씀 앞에 설 뿐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