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고통을 보소서

전봉석 2019. 8. 17. 07:04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삼하 11:27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시편 9:13

 

 

모든 게 의도된 거였다.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라 음욕이 간음으로 이어졌고, 이를 은폐하려고 거짓을 꾸미다 이내 살해를 지시하였다. 결국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슬퍼했으며 누구는 얻고자 하는 것을 취하였다.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그럼에도 이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라니! 오늘 본문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다가도 그 이상의 것이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라는 데서 놀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이러한 절규가 그 안에 주의 영이 계심을 반증한다. 사람은 그저 인생일 뿐이다.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9:20).” 저들은 이내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로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심이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13).” 나를 미워하는 자, 내 안의 나와 나 밖의 나에게서 우리는 고통당한다. 죄의 근성은 여전하여서 은밀하고 의도적이며 주도적이고 의식적이다. 마치 몰랐다는 듯 굴지만 우리의 다윗은 아차, 싶을 때부터 이를 은폐하고 무마하고 덮어씌워 책임을 전가하려고만 하였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 참으로 기가 막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왔다. 숨기고 은폐하고 전가한다. 어둠에 가렸고 불결하고 부패하였다. 이를 도로 회복시키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6:28).” 그럴 수 있는 길은 십자가의 보혈뿐이었다. 우리가 이를 부정할 때, 아무리 베드로라 해도 저는 졸지에 사탄이 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16:22-23).”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를 대속할 대속물이 필요하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그러므로 마귀의 일을 없앨 수 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더위는 한풀 꺾여 에어컨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아버지가 오시는 주일이라 설교원고를 따로 작성하지 않아도 되어 한가한 하루였다. 아이가 외박을 나와 가서 만날까 하였다가 아이엄마가 휴가로 같이 있다고 하여 그마저 안 해도 되었다. 나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에스겔 강해>를 읽었다. 그 읽었던 내용이 오늘 아침 다윗의 죄악과 마주하면서 새삼 하나님과 우리의 단절을 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 모든 게 우연 같으나 필연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고 누워 책을 읽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앞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꾸지람을 듣던 그였다. 그는 옥에 갇힌 영혼이었다. 다윗은 그렇게 절규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9:13).” 염치없으면서도 다행스러운 게 은혜다. 내가 어찌 아버지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아들로 다시 받아 달라 할 수 있을까? 종으로나 삼아주셔도 다행인 것을. 비로소 탕자의 심정이 주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짙은 어둠으로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의심 많은 도마의 고백이다. 우리로 정결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의도이시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36:25).” 이를 위해서도 주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26).” 그러려니 그 부대낌이나 소용돌이 같은 파고가 거칠고 매서울 따름이다. 이내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27).” 말씀 앞에 사로잡힌 삶이라니! 이와 같이 말씀을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나의 오늘이 감사하였다. 이런 게 읽힌다! 읽고 또 읽으며 묵상한다. 다윗의 오늘 이야기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저 매순간 우리는 얼마나 완악하고 간악하며 교활하고 가증스러웠던가?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불러 격려하고 위로하며 저를 집으로 보내 아내와 동침하게 하려했던 저 치졸함 앞에 치를 떤다. 뜻밖에 강직한 충신이었으니 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의 난감함은 또 어땠을까? 기어이 저의 손에 서신을 들려 저를 죽이라 명할 때의 그 잔인한 죄성에 대하여, 나는 알겠다. 내가 그러하였고, 그러하였던 시절에는 그걸 그렇게 큰일이라 여기지도 않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51:1).”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심정이다. 내가 돌아가 아버지의 종으로나 받아주셨으면!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2).” 다른 무엇이 나를 씻겨줄 수 있겠나?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고로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곡식이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닥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36:29).”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지면서 주의 긍휼하심을 드러낸다. 누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하고 자신의 고초를 운운하며 저항하고 억울해하였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바로 그 다음 장이 주의 긍휼하심인 것을.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주소서. 그런데 하나님은 그뿐 아니라, “또 나무의 열매와 밭의 소산을 풍성하게 하여 너희가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여러 나라에게 당하지 아니하게 하리니(36:30).” 황폐하여진 우리의 영혼을 되돌리신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31).” 나의 지나온 날들을 나는 밉게 본다. 송구하고 부끄러워 고개도 들 수 없다. 주 앞의 나의 날들이여! 오늘이라 일컫는 이 한 날의 은혜가 참으로 귀중하고 소중하였다.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오늘에 당면한 이런저런 일들이 때론 힘에 겹고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으나 그러므로 주를 더욱 의지하고 바라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시다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9: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