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삼하 17:2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신념이 믿음을 대신할 때 그 결과는 참혹하다. 스스로 견디지 못해 목을 맨 가룟인 유다나 오늘 본문의 아히도벨 제사장처럼, 우리는 참으로 나약하고 별 수 없는 존재이다. 구원으로 가는 우회로는 없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11:31).” 주의 은혜 외에 다른 여지는 없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을 백성들 앞에서 범하게 하는 사특한 간계를 내어 악을 더욱 악하게 하더니, 심지어 이제는 자신이 다윗과 그의 무리를 처단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나섰던 것이 받들어지지 않자,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3).”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우리의 제멋대로인 믿음을 경고하는 것 같다.
이를 때 나는 주의 것이라는, 그가 나를 지으셨고 만드셨다는, 나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데서 얼마나 안심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지 모른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말씀 앞에서 울컥한다. 생각보다 고되고 힘든 날들이다. 늙은이의 고집은 황소 같고, 모녀간의 말투는 성난 사자 같아서, 나는 번번이 질겁하다 지레 죽겠다. 어디가 아픈 건 둘째 치고 그때마다 불안이 엄습하는 것이다. 나야말로 어디 요양원에 좀 들어가 있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할 때,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2).” 이 모든 상황을 주께서 다 다스리신다는 데서 힘을 얻고 위로를 삼는다.
아,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4-7).”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저는 나를 창세전의 계획하셨고, 오늘을 조성하셨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내가 모른다고 틀린 게 아니고 안다고 해서 맞는 것도 아니다. 다만 주께서 이루어가심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그 어떤 것도, 다른 무엇도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 이와 같이 말씀을 찾아가며 그 위로를 얻음이 복되었다. 아이는 한 시까지 온다. 아침에는 설거지와 집안일을 시켰다. 엄마가 출근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자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느니 지금, 거기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의미에서 그랬다. 한 시에 와서 글을 쓰고 성경공부를 하고 독서를 하고 영어단어를 외우다 돌아간다. 어르고 달래 누군가를 이끈다는 일은 고단하다. 그야말로 나 하나 건사하는 게 버거운 사람인데, 때론 하기 싫어하는 것을 격려하고 위로하기란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이는 또 내가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어서.
죄란 뭐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지금 처한 상황에서 주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다. 그저 그것으로 자기 신념을 삼고 믿음이라 일컬으며 나름 한다고 하는 우리 안의 ‘마술사 시몬’ 같은 뜬구름이다. 저는 자신이 ‘돈을 드려’ 성령을 사려고 하였다. 이처럼 돼도 않을 꿈을 꾸는 게 죄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려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 거저 주시는 은혜에 값을 지불하려는 것이다. 하여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곧 오늘의 나나 영원토록의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존재다. 주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하등에 쓸모없는 자가 주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쓰임을 받는 일이다. 솔직히 장모와 같이 생활하면서 또 오후에는 아이와 같이 지내면서 내 안에 불편함과 어려움이 들어찰 때도 많지만, 그리 놓아두시는 이의 뜻을 붙드는 것. 이것이 오늘에 나를 두신 이유가 아니겠나?
하나님은 결코 그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그 영광을 위해 나와 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43:7).” 그러므로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44:23).” 이는 모두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참고 멸하지 않으신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48:9).” 결코 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11).”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전에 모르던 기쁨이 넘친다. 든든한 것 같고 더욱 강한 신뢰가 드는 것도 같다. 주의 영광을 내 속에 두시겠다는 것 아닌가?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49:3).” 그런 나를 모르지 않으실 것이고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의 영광을 내 위에 나타내실 것이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60:2).” 아무리 현실이 암담하고 갑갑하고 우리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 같으나, 그럼에도 주를 의뢰하고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여호와께서 심으신 내 안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61:3).”
그래서 내가 온전히 잘 견디며 의연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안달을 떨다가도 위로를 받고 진정을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나같이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자가 이와 같은 말씀으로 위로를 삼는 것이다. 주의 영광을 보고 감격하는 일이다. 곧 모든 사물과 상황과 얽히고설킨 사건들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두시는 이 모든 현실이 곧 주의 영광이 되게 하는 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와 같은 말씀을 음미하며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라게 될 줄이야!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영광은 나 같은 자를 돌이키신 사건이다.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엡 1:5-6, 2:7). 이는 이미 창세전에 계획하신, 찬송이다(1:4, 6).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에 이 찬송이 흘러나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새 힘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신비롭고 영광스러울 따름이다. 이를 기억하고 잊지 않고 증거로 삼고 싶어 한다는 게 놀랍다. 결국 이 모든 게 창세전에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이것이 주의 영광이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곧 십자가의 죽이심 앞에서 하나님께 찬송이 되게 하신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나로 하여금 주의 사랑과 긍휼을 바라고 의지하게 하신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아이가 돌아가고 혼자 앉아 이와 같은 말씀을 찾아 읽으며 위로를 얻고, 이 아침 아히도벨과 같은 이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오히려 나의 한 날의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게 하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를 확신함으로 주께 영광이 된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곧 나로 하여금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