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왕상 3:9-10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시편 25:21
주의 마음에 든 자로 산다는 건 얼마나 신날까? ‘듣는 마음’을 주소서,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말씀으로 귀 기울이는 삶이 복되다. 듣는다 함은 소리로 듣는 것 외에 마음으로 스민다는 뜻을 가진다. 햇살이 듣다, 하는 표현과 같이 어느새 물들어 색이 바라고 마음이 물들어, “내가 주를 바라오니” 다른 무엇을 더 원할까?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1).” 그리하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앞에 서는 삶이라니!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6).” 지난날 나의 어리석음과 죄악됨을 주께 고하며,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7).” 이를 나의 무엇으로 보답할까. 말씀을 가져다 내 마음을 듣게 하는 일은 즐거운 부끄러움이다. 아프지 않는 통증 같다.
아이는 안 믿는 부모의 성화로 이번에는 벌초를 다녀와야 해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러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주를 더욱 바라는 마음이어서, 아이의 어쩔 수 없음을 주께서 위로하시고 그 길을 이끌어주시기를 바랐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는 어쩌면 병원에서 근무할지 모른다며 싫은 내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엄마의 성화에 뭐라 반론을 제기할 명분이 없어 서러웠다. 그렇듯 다들 저마다의 고집으로 살고 어쩔 수 없음으로 힘겨워한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8).” 부디 주의 지혜로 우리의 삶을 바르게 이끄시기를.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147:5).” 어찌 뭐라 더 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그저 마음을 졸일 뿐이다. 내가 아이엄마에게 뭐라 한들, 또는 안 믿는 부모에게 어찌 설명을 한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이 모든 상황이 궁극적으로는 주와의 교제를 더욱 내밀하게 하는 거였다. 그의 선하심은 끝이 없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이미 죽어 마땅한 나에게도 이처럼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는 주께서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 저들로 더욱 주를 바라며 의지하게 하여 주시기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장모와 같이 생활한지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본가로 가시기로 했는데 그게 더 걱정이기는 하다. 차라리 궁벽한 살림이나 우리 집에 그냥 모시면 좋겠구먼, 것도 서로가 뜻이 다 달라 내가 더 뭐라 나서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거 보면 사람 사는 게 말하는 일보다 듣는 일이 더 중요하고, 내가 나서는 일보다 지켜보는 일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저마다 다들 자기 생각이 있는 것이어서 아무리 같은 말을 또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고, 그러느니 나는 그저 주께 아뢰는 것이어서 다만 주께 피하는 것이라.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9).” 서운해 할 것도 서러워 할 것도 없다. 사람보고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게 또 사람 관계여서, 저를 사랑하시는 주를 보고 주를 의뢰함이다. 하다못해 가족 간에도 그러한데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과의 관계란 오죽할까.
엄마하고 얘기를 좀 해줄까? 하고 아이를 달랬더니 아이가 고개를 흔든다. 안 하면 뭐 할 건데? 하는 식으로 다그치는 데야 아이가 무슨 수로 항변할 수 있겠나. 등을 토닥이고 어루만져 주는 일 외에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장모의 일도 여기저기 알아보고 요양등급을 받고 사람을 이리저리 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외에 내가 더는 어쩔 수 있겠나. 내가 붙들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가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믿음뿐이라. 나는 주의 기이한 행적을 구한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시 96:3).” 주께서 나를 어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도저히 구제불능인 나를 어떻게 돌이키셨는지, 이를 토대로 주께서 그의 이름을 높이신다는 데 안도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12:4).” 다만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를 뿐.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25:1).” 오늘 다윗은 주 앞에 아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2).” 다만 주의 이름으로 아이를 위하고 내게 더하시는 날들을 살아가는 것뿐이오니, 이 모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게 하려 하심이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9).”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다만 인내할 따름이다. 주께서 주시는 결말을 보는 증거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면서 이미 그 끝을 보고 확신할 수 있는 주의 자비하심 앞에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주가 지으심이다. 그 목적과 경륜을 따라 인도하심이고 어떠하든 주의 선하심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아이의 우울한 나날들과 장모의 얼마 남지 않은 생애와 누구의 완고함과 그로 인한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모든 게 주의 것이라. 말씀으로 의지할 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그리하여 더욱 힘써 지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찾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6:19).”
그러므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20).”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으나, 나는 너무 애써서 살지 않기를 바랐다. 이 땅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또는 놓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이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특히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오직 주만 바란다는 일은 사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니라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는 일이어서, 굳이 부모자식간의 관계라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허울뿐인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할 도리를 다할 뿐 저의 완고함은 어쩌지 못한다. 늙으면 고집만 는다고 다 늙어서 자기 생각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제 그 남은 생이 주만 바라기를, 주님만으로 의지가 되고 모든 의뢰로 삼으시기를, 나는 말씀을 증거하며 장모에게 부탁하였다.
다들 어쩔 수 없는 자기 늪에 빠져 사는 게 인생이고 보면, 난들 나를 어쩔 수 있겠나? 그러므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시 25:3).” 이에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4).” 나로 알게 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5).” 이는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