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전봉석 2019. 9. 8. 07: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왕상 9:3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편 31:24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하는 말씀에서 오래 머문다. 그리 귀히 여기는 데 머물며,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연관지어 생각하면,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31:19).”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은혜이다. 주께 피할 수 있게 한다.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창문을 걸어 잠그고 재난뉴스에 귀를 기울이던 것처럼,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1).” 어제 하루는 요란하였고 모처럼 나른하였다.

 

나의 병적인 태도에 종종 나는 시달린다. 누가 밤새 자소서를 보낼 거라 하여 오전에 봐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아침 7시에 글방으로 나갔다. 하지만 메일은 오지 않았고 나는 기다리다 말았다. 하필 장모가 서울 본가로 돌아가는 토요일에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손위처남은 10시 반까지 모시러오기로 했다가 무슨 일정으로 오후께나 오겠다고 하였다. 이럴 때 나는 조바심에 떤다. 그러니 다들 그런저런 사정이 있겠지만, 강박인지 불안인지 공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앞지른 마음은 억울하기까지 하다. 가령 장모가 계시는 동안 오전 몇 시에 병원에 모시고 가기로 했다. 그럼 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마음을 가다듬느라 안정제까지 먹고도 초조하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는 시간을 어기고, 늦거나 미루면 나는 그때마다 마음이 혼란스럽다. 불안이 엄습한다. 초조감으로 힘들다.

 

다시 이메일을 확인하고 11시에 집으로 올라왔다. 식사를 하고 어머니 짐들을 혹시 몰라 먼저 내 차에 옮겨다 놓았다. 바람은 거칠어져갔다. 비라도 내리면 어찌 모시고 가려는지, 나 혼자 조바심쳤다. 그러고 있을 때 형님이 전화를 하였고 오후께 온다더니 그때 출발하겠다는 연락이었다. 거짓말처럼 어머니를 형님 차에 모시고 짐들을 옮겨 싣고 떠나면서 빗발이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런 변수가 너무 싫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앞서 서둔다고 서둘지만 주변의 상황이 나를 괴롭히듯 대수롭지 않게 이를 어긴다. 기껏 약속을 했고, 그리 할 줄 알고 혹시 몰라 아침 일찍 글방으로 나갔던 것도 우스웠다. 나는 그런 식의 나의 불안과 초조를 아내와 딸에게 말했으나 저들은 번번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니 다음 주간 추석을 쇠러 먼 길을 갔다 와야 한다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속이 볶이고 입이 헐었다.

 

구구한 나의 이야기는 그러므로 주께 바라는 기도를 내포한다.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2).” 나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3).” 조금은 여유롭고 너그럽고 태평했으면 좋겠는데, 하다못해 누군지도 모르는 누가 자소서를 봐줄 수 있냐는 말에 나름은 서둘러 움직였던 것인데, 다들 번번이 대수롭지 않다. 저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으나 그럼 가타부타 연락이 있어야지. 혼자 끙, 하고 돌아앉아 억울한 마음이니 항상 보면 나만 자꾸 속상하다. 같은 말로 호소해도 모르는 사람은 그저 모른다. 가족들도 모른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8).” 그럼 그럴수록 나에게는 말씀만이 길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나의 믿음을 가장 예민하게 마주할 수 있는 때가 나 혼자 불안해할 때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56:10-11).” 불안이 엄습할 때 그 초조감으로 나는 주께 아뢴다. 주를 믿음으로 믿음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를 안다. 믿음이란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겸손히 바라는 즐거움이다. 감히 나의 초조를 즐거움이라 표현하는 것은 이처럼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런 와중에도 주께서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깨닫고 느끼며 감사할 수 있어서이다. 어제 같이 하늘의 여러 변화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느낀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1).” 요란하고 불안하였던 날씨에 하필 어머니가 본가로 돌아가시는 날이어서 너무 예민하고 초조하였던 날이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9).” 뉴스마다 속수무책인 우리의 나약함을 드러냈다. 힘없이 날려가고 쓰러지는 것들을 보며,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사람들도 이미 다 알고들 있다. 다만 설마, 하면서 저들은 외면하지만 나는 나의 강박적이고 예민한 불안증으로도 주를 더욱 바란다. 단지 누구에게 호의로 선의로 마음을 쓰는 게 아니다. 우리들의 선의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평탄하게 깔아놓을 뿐이다.

 

오직 하나 복음만이다.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까닭을 누가 묻는다면 그것으로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누구의 마음까지 내가 상종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5).” 다만 나에게 두신 이런저런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주를 더욱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6).” 이를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런데 자꾸 다른 데 신경을 쓰는 꼴이다.

 

어쩌겠나? 누가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고, 오기로 했던 시간을 어기고 다만 이따 전화할게하는 식의 변수가 나를 힘들게 한다. 어쩔 수 없다면 여차하여 그리 된 걸 알리고 다시 해도 될 텐데. 다들 저만 생각하는 것처럼 나 또한 나만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어제 하루는 그렇듯 혼자 정신없었고 혼자 불안하였고 혼자 초조하던 날이었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그러한가, 억울한 마음도 들지만, 그럼 그럴수록 나는 더욱 주를 바란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31:4).” 요란하고 엄청나게 불안하였던 하루였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5).”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나의 절박했던 심정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6).”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9).” 그러니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16).” 나의 예민하고 불안하고 초조하여 강박적으로 앞서는 마음이라지만,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17).” 이에 그 답이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