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왕상 20:42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두 번 침략하였다. 이때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저들을 물리쳤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고 은혜를 깨닫기 바라셨으나 결국 아합은 벤하닷을 놓아주었다. 이에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왕상 20:42).” 주의 사람이 이를 일깨우고 전하여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앉으면 하나님의 ‘내가, 작정한 사람’ 벤하닷이나 이를 들어 아합을 일깨우시고 주의 백성을 바로 세우려는 것을 본다. 하지만 이를 바로 알지 못할 때 어려움은 따른다. 하나님의 도구와 하나님의 백성은 다르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엄연히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다.’ 주의 자녀다. 나는 요즘 이와 같은 사실 앞에 놀라워한다.
저는 아침마다 출근을 하면 문자를 한다. 나는 저에게 묵상글과 말씀을 보낸다. 지난 주일에는 몇 년 만에 교회를 나갔다고 하더니 어제는 수요예배에 왔다며 문자를 주었다. 이를 보며 기뻐하고 함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그러려고 추석날을 전후해 나를 붙들어두신 것도 오해가 풀렸다. 돌아보면 한 영혼을 붙드시는 데 있어 전우주적인 역사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과 역경조차도 선을 이루시는 데 쓰인다.
늘 근심과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기 일쑤지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나는 아이의 일로 힘들어하다 누나와 통화하면서 들려준 말씀을 기억하였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본인도 힘들 때 이 말씀을 숱하게 되뇌며 묵상한다고, 저들에게도 들려주라 하였을 때 그 말씀이 나를 먼저 붙드시는 것이었다. 어제는 이를 본문으로 하여 설교원고를 작성하였고 그러는 중에 큰 위로와 확신이 나를 붙드셨다. 염려만 하고 있을 것인가, 기도할 것인가? 말씀은 선택을 요구하신다.
기도는 신기하게도 감사를 보게 하신다. 그래서 기도를 너무 멀어서 보지 못하였던 것을 보게 하는 망원경으로, 또는 너무 작아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는 현미경으로 비유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집중하게 한다. 오만잡것들로 사로잡혀서 정작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였던 마음을 염려가 기도하게 함으로 다시금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강이라니! 염려와 근심거리는 여전한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내 안에서 나의 마음을 지키시는 것이었다. 더하여 나는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곧 증인된 자로 나는 저에게, 아이에게 들려주고 보여주어야 한다.
이 일은 결코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신다.” 곧 우리 안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이었다. 단지 나는 저의 생이 안타깝고 속상하여 측은지심으로 여겨 불쌍히만 생각하였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셨다. 온전히 우리의 영혼이었다. 비록 그 외모나 처지나 상황은 참담하고 서럽기가 그지없다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것이다. 이는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예화에서도 볼 수 있다. 호의호식하며 부자로 살았던 이와 대비되면서 정작 우리의 축복은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들려주신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아이가 왔고, 같이 글을 쓰고 아이와 시편을 묵상하면서, 내 안에 두시는 알 수 없는 마음으로 힘을 얻었다.
즉 염려는 우리를 기도하게 하고, 기도는 감사하게 하며, 감사는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강’을 두시는 과정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는 놀라운 역사다. 왜 다 아신다고 하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지 알았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문맥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은밀한 중에 다 보고 계시고(6:6),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지 다 아시는 주님이,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4).” 굳이 우리더러 끈기 있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상한 심령을 제사보다 귀히 여기시지만 이 마음을 갈아엎어야 하는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이로써 우리로 회개하게 하심으로 죄 사함을 더하시고, 내 마음의 임금이 되신다. 저는 나의 통치자가 되신다. 아이는 직장을 얻고 새로 약의 농도를 높여서 그런가, 훨씬 자기표현이 수월해졌다. 누구는 수요예배까지 나아가면서 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찾았고, 아이는 학교를 오르내리며 ‘예민해진 마음’으로 주를 더욱 찾고, 구하고, 두드리게 되었다. 저들의 사연을 듣거나 읽으면서, 우리는 가정예배 때 저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였다. 주가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세계의 현장에 나는 증인으로 서 있다. 이 증거를 확신함으로 주어진 한 날의 삶에서 감사와 평강을 느낄 수 있었다.
나 같이 보잘것없는 자에게 이와 같이 귀한 은혜를 담으셨으나, 오후께는 다리가 저리고 시려 쩔쩔매며 난로를 끌어안고 있었고 또 아이와 점심으로 먹은 햄버거가 얹혔는지 속이 답답하고 불편해서 한 시간 가까이 교회 안을 맴돌면서,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 아이러니하지만, 그럼 좀 삶의 질도 나아지려나 싶은데 나의 몸뚱이는 여전하였고 여전하여서 힘이 들었지만 그리하여서 더욱 주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나는 이와 같은 톱니바퀴에서 오히려 주의 은혜를 실감한다. 나에게 평강이란 막연하지 않다. 감사란 그저 그런 느낌의 것이 아니다. 이처럼 평안히 앉아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글로 쓸 수 있는, 오늘은 괜찮은 컨디션과 어깨와 마음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한 것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다.’ 오늘 우리에게 두신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로 예수를 알게 하심이 모두 하나님께 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오늘 내게 두시는 주의 일이다.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 여전함에 대하여, 그럴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함께 하시는 주의 성령이심을.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일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