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전봉석 2019. 9. 20. 07:0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왕상 21:25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43:3

 

 

혼탁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대다. 개인의 생각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언론은 말()의 저주로 변질되어 그렇다고 하더라는 식의 추측성 보도를 이어간다. 쓸려 다니는 안개처럼 여론은 가볍기만 하고 서로는 서로를 부추기고 현혹하여 자신들 이익에 따라 말의 폭력을 휘두른다. 그런데 정작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게 고작 나봇의 포도원이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왕상 21:25).” 본래 죄는 유치하면서도 한심하고 별것 아님에도 대단한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아이와 같이 시편 119143절을 글씨로 여러 번 옮겨 적었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사람들은 본래 허탄해하게 돼 있다. 누가 그러는 게 아니라 언제든 내가 그런다. 발달한 인터넷이 여기에 날개를 달았다. 쓸데없는 말에 귀 기울인다.

 

멈추고 듣고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 빛이 우리 안에 비추어야 한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43:3).” 옳고 그름이 시시각각 변하는 터라,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4:31).” 말씀 앞에 가만히 앉을 때 비로소 잃어버린 뜨거움이 되살아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그러할 때 가던 길을 돌이켜 주의 뜻을 따를 수 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5, 48).” 우리의 증인됨이 참 귀하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말씀이 늘 새롭다.

 

아침에는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점심께는 아이가 왔다. 아이가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원고를 출력하고 교정을 보고 주보를 작성하였다. 모처럼 컨디션이 좋은 하루였다. 다들 사느라 여념이 없는 삶 가운데서 보람과 즐거움을 다른 데 두고 사는 일은 놀라운 것 같다. 아이를 다독여서 말씀을 같이 묵상하고 책을 읽거나 영어단어를 외우고 보냈다. 성가시고 힘들다가도 아이가 돌아가면 순간 나른함이 피로감으로 몰려온다. 소파에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아내가 전화를 하여 똥싸개가 이사를 간다며 서운해 하였다. 유난히 정을 주고 마음을 두었던 아이라 마음이 허전한가보았다.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주의 마음과 주의 사랑이 필요해서이다. 돌아보면 내가 싫고 좋고의 문제는 아니다. 사는 게 사명이고 마주하는 게 사역이었다. 유난을 떨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능사가 아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의지나 우리 노력으로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저마다 약속을 붙들고 살았으나 그 증거를 보지 못하고 믿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이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다는 데 감격할 뿐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응답은 멀지만 하나님의 평강은 가깝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응답이 금세 오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 확증으로 우리 안에 두시는 평강으로 이겨내는 싸움이다. 누구는 박사 학위를 따고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주의 일에 쓰임받기를 원하였으나 도리어 제자리걸음이라 허탈해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만 예수의 이름을 신뢰하는 것. 그래서 기도마다 예수 이름으로기도하는 까닭은 저가 이루시고 함께 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은 막연하고 내 안의 평강도 주관적이지만 말씀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내 안에 기도가 일어나면 그야말로 저절로 감사가 나오게 돼 있다. 그래서 기도는 발견이고 집중이다. 나는 서성거리다 누구를 생각하고 저의 삶을 주께 아뢴다. 왜 또 전화는 고객님의 요청에 의하여정지된 것일까? 상태가 더 나빠졌나? 나는 아이가 유학을 떠나지 않았으면 싶다. 누구와 동거하는 일도 서로 깨졌으면 좋겠다. 아이엄마가 차라리 유방암이 도저 생의 기로에 서면 어떨까? 고약한 마음이라는 걸 알지만 그러지 않고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 잘 나가면 나갈수록 하나님과는 멀어지는 길이어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혼자 궁싯거리듯 주께 아뢰었다.

 

너무 풍요롭고 너무 자유로운 게 문제다. 가진 게 많으니 뻘짓도 는다. 적당한 건강과 주머니의 돈이 저를 돌아보게 하지 않는다. 고약한 심보 같지만 염려는 그래서 무조건 나쁜 게 아닌 것이다. 내게 두신 연약한 몸뚱이가 복이 된다. 나는 아이에게 이를 일러주고 싶은데,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며 사는 게 복이라는 것을, 내가 느끼는 것을 어떻게 들려줄 수 있을까? 내가 보는 것을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들리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어느 아이는 굳이 그런 소릴 원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며 얼른 통화를 끊었다. 누구의 말처럼 염려의 끝은 기도다. 기도의 끝은 염려다.’ 저들은 다들 괜찮다는데 괜히 나만 혼자서 마음을 끓이는 것일까? 세상이 혼탁하여, 아니 너무 좋아서! 나는 늘 나의 젊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이를 주께 아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살 수 있다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

 

형을 만나고 제가 주안에서 사네요.’ 하는 말보다 값진 선물은 없을 것 같다. 아침에 돌아온 문자가 하루 종일 나의 영혼을 즐겁게 하였다.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고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가장 존귀히 영광을 받으시는 때는 언제일까? 하나님으로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 때, 내 안에 하나님으로만 충만할 때. 이런저런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래서 주를 더 바라고 의지할 때, 이것이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이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단 하루를 산다 해도 이제는 온전히 주님으로만 충만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그럴 수 있도록 주는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주신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27).” 곧 저와 같은 고백은 내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다. 곧 영광의 소망이다.

 

우리가 한 아이로 인해, 저 아이를 두고 서러워하고 서운해 하고 속상해하기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주의 마음이기 때문이겠다. 내 생각으로는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굴 염려한단 말인지. 근데 그게 자꾸 마음이 쓰여 견딜 수가 없는 일이다. 아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고. 또 누구에 대하여는 더 이상 내 전화도 달가워하지 않는데도 마음이 기울어 나 혼자 애면글면 속 태우는 일에 대하여, 나는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내 스스로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다. 그냥, 그렇듯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음으로 주의 이름을 되뇌는 일.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7:18-19).” 주님도 날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

 

불현듯 누구를 생각하다 속상하고 답답하여 내가 주를 부를 때,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43:2).” 주께 아뢰고 고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오늘 하루도 주가 주시는 모든 형편과 사정으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