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전봉석 2019. 9. 25. 07:04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왕하 4:44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시편 48:9

 

 

주의 길을 행하는 데 있어 가장 즐거운 일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누가 함께 하게 되는 경우가 아닐까? 오늘 본문을 읽는 동안, 그리고 딸애 밥을 차려주는 동안에도 내내 그 생각이었다. 가장 오래된 친구와의 통화에서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게 두어 달 됐다는 말에 잘했다, 잘했다, 나도 모르게 좋아서 탄성을 질렀다. 하긴 그의 아내는 신학까지 한 사람인데 더는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어서 내심 마음이 아팠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내가 다시 다니기 시작하였고 아내가 가자니까 이 친구도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따라 나섰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말이 오갔으나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하였구나, 하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조만간 만나기로 하고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늘 볼 때마다 잔소리하듯 교회 다녀라, 다시 신앙생활해라, 하면서 뭐라 하던 것인데.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48:14).”

 

선지자의 아내 중 한 여인이 과부가 되었다. 저는 빚이 많아 두 아들을 잃게 생겼다. 엘리사에게 와서 말하자, 집에 있는 기름 한 그릇으로 수십 그릇의 기름을 만들어 빚을 갚게 하였다. 또 하루는 수넴에 이르렀을 때 한 가정이 강권하여 저를 대접하고 저의 방을 만들어주었다. 이에 저들에게 없는 아이가 생기게 하였으나 죽어 슬픔에 잠겼다. 이 죽은 아이를 살려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 또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제자들이 먹을 게 없어 국을 끓였는데 하필 독이 퍼졌다. 이에 가루를 가져다 넣고 끓여 독을 없앴다. 또한 비루한 자루를 가져다 백 명이 먹을 음식을 만들어 먹였다. 안 될 줄 알았던 일이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4).”

 

우리가 생각이 많을 때 주께서 이루신다. 나는 늘 적절한 말씀 앞에서 위로를 받는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94:17).” 때론 아무 소용도 없으려나, 하고 실의에 젖어 있을 때도 있다. 가령 오래된 친구에 대한 마음이 그러했다. 그러니 늘 마음이 시원찮았는데 그와 같은 연락이 나를 기쁘게 하였다. 1 때 같은 반이고 종종 우리 교회에서 가는 수련회도 따라가며 같이 신앙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같이 어울려 보낸 세월이 가장 오래된 사이였다. 한데 나는 기어이 목사가 되고 저는 그런 나를 그러려니 하면서도 돌이키지 않아 내내 마음을 어렵게 하던 친구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말로 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오히려 나는 저에게 닥치는 일들을 보며 두려움에 돌이키게 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늘 나는 저에게 빚을 진 마음이어서 생각날 때마다 주께 아뢰어 바라고는 하였는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이를 우리 말 성경을 다시 보면, “내 마음이 복잡할 때 주의 위로가 내 영혼을 기쁘게 합니다.” 그 위로는 단순하여서 저가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를 때가 아닌가싶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나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말씀에 붙들려 있는 나의 모습이 때론 저들에게 고리타분하고 한심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겠으나 돌이켜 주 앞에 나아갈 때 마치 우리는 이정표 같은 구실이 된다. 멀리서도 보고 찾아올 수 있는 등대 같은 역할이다.

 

토요일에 뭐하세요? 가도 돼요? 하는 누구의 연락에 나도 모르게 기꺼이 저를 초대하고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할 때의 마음을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여호와는 내 빛이시요, 내 구원이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호와는 내 삶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겠습니까?(27:1).” 우리말 성경의 단순한 표현이 이해가 쉽다.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것이 있으니 내가 찾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평생 여호와의 집에 있어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주의 성전에서 여쭙는 것입니다(4).” 나로 하여금 왜 오늘 여기에 홀로 두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명료하였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3:20).” 아뢰고 또 구하는 일이었다.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긴 한숨과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고는 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리 응답을 하시었다. 잘했다, 잘했다, 하고 나는 친구에게 여러 번 응원하며 좋아하였다.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31:25-26).” 마음이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아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나. 단지 그냥 나를 여기에 두시는 게 아닐 거였다. 저가 온다고 하고, 누가 보자고 할 때 나는 저들에게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이정표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인데, 길을 찾아가는 표식이 된다.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저 흩어지고 사라져 나의 되뇜은 부질없는 것 같으나 그 말 하나도 허투루 버려지지 않게 하시는 이가 오늘 저 친구를 또 누구를 주께 돌이켜 함께 그 남은 항해를 같이 하게 하신다. 그러게,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0:15).”

 

종종 이래봐야 뭐하나 싶어, 마음이 저 혼자 어려울 때가 있는데 그것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어 나의 잠을 달게 하시는 거였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6:27).” 그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였으나 수십년만에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고 은근히 그걸 자랑하듯 말하고 싶어서 모처럼 전화를 걸어온 친구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여전히 사느라 아등바등 고약한 길을 가고 있지만 그의 걸음을 다시 교회로 인도하신 이가 반드시 그의 영혼도 돌이키실 것을 믿는다. 곧 하나님의 일이란,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

 

나는 혼자서 마치 식재료를 다듬고 또 손질하며 여러 음식을 만들어놓는 주방 일처럼,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을 겅중거리며 읽고, 그때마다 메모를 하고 또 이처럼 묵상글을 쓰면서 마치 이것이 설교원고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무던히 행할 따름이다. 누가 알든 모르든, 읽든 말든, 고작 친구 한 명이 또 누가 몇 십 년 만에 또는 아픈 아이 하나로 씨름하는 게 전부인 것 같으나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이 일을 무던하게 지키고 준행하는 것이 일이었다. 곧 주의 계명은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일 뿐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1:5).” 결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이 일하고 계셨다.

 

당연히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48:1).” 나는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찬송한다. 고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00:3).” 그러므로 주가 인도하심은 마땅하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48:9).” 고로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