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왕하 5:13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말씀에서 세 부류의 종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의 집에 있는 어린 몸종 소녀이다. 저는 나아만의 아내를 시중들다 주인이 문둥병에 걸렸다는 소리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소개한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5:3).” 또 하나는 나아만의 종들로 저가 엘리사를 만나러 갔다가 자신을 내다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소리에 발끈하여 돌아서자,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13).” 하고 저를 바로 세운다. 나머지 하나는 엘리사의 종 게하시로 저가 보상하려는 나아만의 것을 대신 받았다.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23).”
적재적소에 하나님은 우리를 두셨다. 한데 엘리사의 말처럼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26).” 어떤 보상을 바라고 주의 일에 참여하겠나? 주의 사람 엘리사를 그때에 소개하려고 이스라엘 소녀가 거기에 잡혀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나아만의 종들이 아무런 역할도 않고 그냥 돌아갔으면 또 어땠을까? 한데 늘 곁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거하던 게하시의 소행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타성에 젖었던 것일까? 또는 욕심에 끌렸던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주의 사람이 이미 다 보고, 알고, 듣는 사람이라는 것을 게하시는 순간 왜 몰랐던 것일까? 이를 생각하며 오늘 시편을 묵상하면,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시 49:1-2).” 주의 뜻과 그 음성을 바르게 들을 수 있는 것이 귀하였다.
게으름을 떠느라 아이가 오지 않았다. 바로 오후에 출근을 하게 되었으니 오전에 글방을 왔다 가는 게 귀찮기는 할 일이다. 전날에도 그러더니 또 그래서 아무래도 뭐라 나무랬다. 물론 늘 내 안에는 두 마음이 섞인다. 아이가 안 와서 좋기도 하고, 그래도 바로 일러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어쩌면 오늘 저 세 부류의 사람들도 그 속에 똑같은 갈등이 있지는 않았을까? 굳이 나서서 행여 일을 그르치면 공연히 낭패인데, 그럼에도 주의 사람 엘리사에 대한 소식을 주인에게 말하였던 소녀의 결의가 필요하겠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또한 나아만을 시중들어 엘리사를 만나러 갔던 이들의 용기 있는 선택이다. 주인의 말처럼 기껏 요단강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아무런 증상도 나음이 없다면 오히려 그 화풀이가 자신들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아이가 오고 안 오고, 그러려니 하고 그냥 모른 체 하고 싶은 생각은 그래서이고, 그러나 그렇듯 늘어져 게으름을 떨고 게임이나 하다 점심께 일하러 가는 것을 두고 보는 것은 아닐 거라 여겨! 아무튼 알아듣게 얘길 했으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인생으로 치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하던가? 젊음은 아름다워 꽃과 같으나 금세 시드는 것이고, 건강은 반짝 힘을 더하다 골골하는 것이어서, 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꽃과 같아서 금세 마르고 떨어지는 것. 오고 안 오고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고 있으면 되겠나? 하고 일러주는 것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대로 할 뿐이다. 종종 아내를 보면 그 선택이 놀랍다. 보름 남짓 시간을 두고 ‘똥싸개’가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고, 그 기간은 그냥 보내시라 하는 것이다. 당장 떠나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아내는 아이를 오게 하였고. 아뿔싸, 아이아빠가 무슨 근종을 떼 내는 큰 수술을 하면서 이사가 미뤄졌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일에 우리는 묵묵히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뿐이다. 비록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는 증거를 붙든다. 덕분에 설교원고를 작성하였고 미루던 병원에 들러 고혈압 약을 받아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을 주시려고 우리를 만드셨고, 그 사랑을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여기에 두셨다.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주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죄다. 불순종이다. 이를 무시하는 것이 죄과이고, 자기 맘대로 왜곡하여 삐뚤게 받는 것이 죄악이다. 이를 결론으로 삼았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7-19).” 주가 내게 도움이 아니시면 내 영혼은 침묵 속에 잠긴다. 나의 발이 미끌어질 때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신다.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한다. 다들 생각이 많은 시절이다. 어디서 본 통계로는 그래서 가장 잠 못 드는 나라가 미국이다. 수면제 소비량이 엄청나다. 그 종류도 수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노릇이다. 이방 나라에 잡혀가 몸종을 살던 소녀도 아는 일을 곁에서 늘 지켜보며 같이 놀라워했을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어째서 몰랐던 것일까? 다들 마음이 복잡하다. 생각이 많다. 아이엄마는 아이엄마대로 이런저런 궁리가 많을 테고,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그처럼 늘 근심과 염려는 사라질 줄 모르는데, 그럼 우리의 판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먼저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야 한다. 미안함이나 안쓰러움 정도가 아니다. 아이가 안 오니까 그냥 편하고 좋아서 그러려니 할 건 아니었다. 그러고 있자니 마음에 찔린 것이다. 그래봐야 그 시간에 게임이나 하고 늘어져 공상이나 하고 있을 텐데…. 주께서 나의 마음을 단련하신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26:2).”
그러할 때 믿음이 생긴다. 오든 안 오든 그 일이 내 일이 아니라, 오라 하여 같이 말씀을 읽고 쓰고 하는 동안 성령이 하실 것임을 믿는 일이다. ‘아픈 아이’니까, 하는 나의 선입견은 금물이다. 그런저런 형편일 텐데, 하고 앞서 측은히 여기는 생각도 바르지 않다. 때론 단도직입적으로, 뜸들이지 않고 직설적인 말의 방법이 중요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굳이 내가 나서봐야 뭐하겠나? 하는 식의 소극적인 외면이 실은 늘 주저하게 하고 외면하게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만일 저들이 그 소임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어찌 이루어졌겠나? 생각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세 번째는 기도였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신 이, 전하게 하신 이에게 아뢰어 주께서 붙드시고 위로가 되시기를. 그리하여 내 속에 생각이 많고, 마음이 어려워 근심이 많을 때에 주께 아뢰는 것! 그러므로 주의 위안이 나의 영혼을 즐겁게 하시는 것이다.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이처럼 말씀 붙들자. 말씀만으로 살자. 굳이 앞뒤 생각하며 내가 떠안을 문제도 아니다.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렘 31:25-26).” 주께서 늘 함께 하심으로,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시 49:3).”
그러므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