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왕하 6:33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편 50:21
하나님은 하나님 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돌보신다. 서두의 물에 빠진 돌도끼 사건은 이를 일깨우신다. 아람군이 엘리사를 잡으러 왔으나 도리어 사로잡힌 일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아 결국 사마리성은 아람군에 의해 포위되어 굶주린 사람들이 서로의 자식을 잡아먹는 참으로 끔찍한 최악의 일이 발생한다. ‘사람은 존귀하나 이를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게 없다.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왕하 6:33).” 더는 하나님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저주다.
지금 우리 마음의 현주소는 어떨까? 아예 길가밭 같은 마음에는 희망이 없다. 사탄이 와서 금세 저의 마음의 말씀을 물어간다. 돌밭도 마찬가지다. 그의 마음이 너무 딱딱하고 견고하여 도무지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금세 그러다 마는 시늉만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가시밭 같은 마음은 교회 안에서도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의 가시’를 거두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에 대한 미움과 시기와 탐욕은 물론 교만과 자기애가 자라고 있는데도 내버려두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셨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 8:14). 먼저는 이생의 염려다. 죽 끓듯 일어나는 염려로 도무지 교회 안에서도 위로가 없다. 다음은 재리다.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저마다 탐심을 제어하지 않는다. 남들처럼 갖는 것도 모자라 더 갖고 싶고,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명품이 판을 친다. 또 하나는 향락이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에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온통 쏟아 붓는다. 취미와 여가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
더는 여호와를 기다릴 수 없는 마음으로는 좋은 밭이 될 수 없다. 그 마음이 좋은 밭이란 말씀을 깨닫는 일이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그리하여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열매를 배로 맺는다. 열매란 무얼까? 물론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살며 한 영혼을 전도하고 교회에 헌신하는 일이겠다. 그러나 영혼이 강건하여져야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4).” 그래서 다음은 그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누구를 만나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으로 무슨 일에 관여하는지,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따르는 일이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열망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삶이 되기를 갈망한다.
이에 늘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책으로 엮인 것은 1516년 에라스무스 때였다. 그 전까지 주께서 특별히 세우신 수사들이 손으로 직접 베껴 쓰고 필사하여 그 가지 수가 무려 5800여 편이 넘는다고 한다. 사본이란 그 자체가 손으로 필사하였다는 것인데, 당연히 오류도 있고 잘못 표기하는 실수도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수많은 성경과 비교하고 대조하여 그 가운데서 정경으로 인정된 것이 오늘의 성경이다. 이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더 수정되고 표기가 바뀌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신뢰한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된 것처럼 그 사람이 기록하고 만든 책 가운데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불어넣으셨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가타부타 여러 해석과 견해가 난무하지만 나는 오늘 내가 읽고 이해하고 묵상하는 성경으로 이는 엄연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령 누구 말처럼 무슨 해석의 오류가 있고 문법적인 오문이 있다 해도 그것까지도 나의 이해와 상식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감동, 그 불어넣으심을 나는 신뢰한다. 성경은 결코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지만 또한 사람의 지식으로 규정하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읽고 이해하고 묵상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 이를 깨닫지 못하면 존귀하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엄중히 경고하시는 것이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귀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모하고 알고 붙들려 사는 것이 복이다.
주의 말을 내 입에 두시리니!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8).” 나는 아이가 와서 글을 쓰고 같이 아이의 글을 같이 소리 내어 읽고, 또한 성경을 한 장 읽고 이를 글씨로 옮겨 쓰고, 되새겨 아이에게 설명해주는 일. 그 답은 늘 엉뚱한 소리로 돌아오지만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다시, 또 다시 되풀이하여야 하는 것이 내 일이라. 아이와 내려가 점심을 서둘러 먹고 저쪽 백화점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가서 버스를 태워 오후 근무지로 보내는 일. 이 모든 게 오늘 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듭 쓰여지고 다시 되새겨지는 여정이 좋은 땅의 결실로 맺어지는 열매의 한 과정이 아니겠나? 성경을 다시 쓴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으로 쓰여지는 삶이라는 것은 이처럼 무던히 내 안의 염려와 재리와 향락의 뿌리를 거둬내는 일이다. 정신 나간 농부가 아니라면 자기 밭에 가시나무가 자라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거둬내고 또 거둬내기를 징글징글하게 되풀이하면서도 오늘도 다시 밭으로 나간다. 그리하여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이를 무던히 달려가면서도 읽는 게 좋은 땅의 열매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아이에게 또는 누구에게 그러한 시간을 사모하기를. 긴 시간을 요하는 게 아니고 그저 형식적으로 관여하는 게 아니라, 단 한 구절이라도 쓰고 되새기고 마음에 심어 뿌리를 내리는 일.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겔 43:11).” 아예 듣기 싫어하는 길가 밭이나 듣고도 금세 마음이 굳어지는 돌밭의 경우에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해도, 같이 저의 밭의 가시를 거둬내는 일은 곁에 두신 밭으로 거둬내고 같이 또 거둬내기를 무던히 계속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밭을 옥토로 바꾸어가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리 여기면서 더는 아이의 대답이나 어떤 반응을 보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렇듯 오는 것만으로도 주께서 내게 ‘불어넣으신 일’이란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말씀 앞에 엄히 깨달음을 받는 것이 복되었다. 그리하여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