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왕하 9:7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3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 요람의 시체가 저의 부친 아합이 빼앗아 정원으로 삼은 나봇의 포도원에 버려졌고 그의 어머니 이세벨의 시체는 개의 먹이가 되었다(왕상 21:19, 23). 예후는 이스라엘 왕 요람과 병문안차 와 있던 유다 왕 아하시야와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를 차례로 죽였다. 이는 모두 그리 예언된 결과였다(19:16). 예언이 성취된다는 데 두려움과 놀라움이 앞선다. 날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신 예수님,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이는 나 같은 죄인을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데 경이롭다. 지난한 저들의 역사에서 기어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됨을 보고 오늘에 이르러 나를 주의 백성으로 삼으신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한데 여전히 길을 잃은 듯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이 시대의 시류가 안타깝다. 돌아오는 3일에 기독교인이 대동단결하여 무슨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며 손위 처남이 식사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좌파가 어쩌고 하는 소리는 그럼 우리는 우파여야 하는가? 오히려 모든 역사에서 기독교의 줄기는 보수가 아닌 진보였고, 이쪽이냐 저쪽이냐가 아닌 외톨이였다. 뭐라 설명하려다 말을 돌린 까닭은 정치나 종교 이야기에서는 충돌뿐이다. 그럼 이쪽은 더 나은가?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3).”
부디 우리의 악함을 개탄하고 차라리 골방에 들어가시길.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6).”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이 땅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까닭은 각기 저들 모두 선을 행하는 자가 없음이다. 이는 갸롯인 유다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내남없이 우린 다를 게 없는 존재이다. 저는 먼저 돈과 연관이 있었다. 늘 저의 이야기가 등장할 때면 돈이 따라 나왔다. 돈궤를 맡은 자였고(요 13:29), 기어이 돈으로 예수를 판 자였다(마 26:25). 솔직히 그 속을 까보면 구국의 일념이란 게 다들 밥그릇 싸움인 것이다. 가진 걸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고, 있는 자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면 못할 게 없는 사람들이다. 돈은 그렇게 축적되는 법이다.
엄연히 성경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또한 유다를 통해 보면 신앙을 무슨 이념과 사상으로 혼용하여 마치 하나님을 이 땅의 신들처럼 싸구려로 만든다. 모두 자기 뜻과 신념에 고집이 강한 것이다. 유다가 그러했다. 저는 열심당원이었고 과격분자였으며 원리분자였다. 저들은 뜻을 이루는 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며 자리에 연연하고 명분을 중시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그러니 나는 우선 교회가 나서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 목사들이 자기 개인의 성향을 성경에 빗대어 사람들을 선동하듯 돌격대를 구성하는 것에 개탄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엄히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그럼에도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너는 어느 쪽이냐 묻고 총질을 해대는데 기독교가 앞장을 서는 것에, 나는 그래서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누구와 나누는 것에 주의한다. 뭐라 한들 각기 자기들 생각이 있는 것이고, 그걸 마치 하나님의 뜻이라 우겨대면서 진리를 운운하는 것에 마음이 어렵다. 어느 훗날 우리가 천국에서 만난다면 각기 적군으로 나서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반가이 주의 이름으로 맞이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에게는 주의 은총만이 살 길이다. 실제 자기의 완악함을 하나님의 뜻으로 선동하는 이들을 그래서 나는 혐오한다.
또한 갸롯인 유다의 교훈은 여러 번의 경고와 교훈을 듣고도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이가시기 전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이다. 발을 씻기면서도 유다에게 들려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10).” 심지어는 떡을 떼시면서도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 그리고도 아예 대놓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21).” 말씀하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저의 마음은 미련하고 아둔해서일까? 저는 결국 자신의 신념과 아집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충실하였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
나는 어느 쪽을 더 두둔하려는 게 아니다. 또는 양쪽이 다 똑같다며 회색분자로 외면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더욱 더 나의 주장을 삼가려는 것이다. 목사로서 기독교인으로서 더더욱 우리는 누구를 지지하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한다. 말은 더 많은 말을 낳아서 이내 힘이 되고 폭력이 되고 억압이 된다. 그저 무분별하게 누가 어느 종교니, 교회에서 직분이 뭐니 하는 따위의 것으로 기준을 삼아서도 안 된다. 우리야말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회에서 쓸려 다니는 안개처럼 거리로 뛰쳐나가는 짓은 주의해야 한다. 내가 누구더러 가라 가지마라 할 것은 아니지만 이를 아이들 앞에서 주워 삼키려는 것을 대꾸하지 않음으로 말을 돌렸다. 그러한 선동은 하나님을 없이 하는 자들의 몫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거리로 나가 태극기를 들고 십자가를 들고 찬송을 선동가로 불러 젖히는 추태 앞에서 나는 모멸감을 느낀다. 저가 또 그 말을 강단에서 설교하는 자의 입으로 지껄여대는 것을 경멸한다. 교회는 이 땅에 있으나 이 땅에 속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2).” 누가 누구더러 사탄을 운운하며 죄를 정죄할 것인가. 우리는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3).” 이를 열왕기서를 읽으면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서로를 규탄하고 억압하고 정죄하는 일에 서슴지 않는 정치적인 선동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5).” 휩쓸려 다니지 마시라. 부디 자중하시라. 하나님은 보수의 하나님이신가? 진보의 하나님은 아니신가?
공연히 아이와 성경공부도 못하고 아이는 먼저 돌아갔다. 이런 게 참 나를 어렵게 하였다. 다들 보면 저마다 할 말이 많다. 나야말로 그만 말하자. 나는 누구 편도 아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것으로 충분하였다. 다른 무슨 명분을 내세워서 누구를 향해 돌격할 것인가?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6: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