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요아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칠 세였더라
왕하 11:21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예후가 아합의 후예를 몰살하자 살아남은 아합의 딸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을 진멸하려 한다. 그 와중에 일곱 살 요하스가 왕위에 오른다. 이처럼 열왕들의 이야기가 참혹하기 그지없고 서로에 대한 증오와 복수가 이어지면서 하나님의 뜻을 흐려놓는다. “요아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칠 세였더라(왕하 11:21).” 오죽하니 그럴까? 그러는 중에 그 속에는 알게 모르게 열등의식이 자리한다. 그런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점점 더 유명 브랜드는 값을 올리면서 사람들의 열등감을 이용한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이와의 오랜 대화 때문이다. 한 주간 일하고, 그것이 일당인지 훈련비인지 알 수 없으나 팔만 칠천 원을 받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것으로 또 자기를 위해 옷을 산다고 하며 그 안달이 며칠째 이어지는 것이어서,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쓰고 다니는 모자부터 신발, 옷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온통 다 명품들이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자중하는 편이라고들 하니 그 화근이 병적인 데 있구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나마 돈이 들어오기로 하고 안 들어오자 몸살이 난다. 하긴 어느 심리학책에서 보니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계속 몰아붙이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 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평소 옷이 넘쳐나고 또 얼마 전에도 느닷없이 옷을 샀던 것을 상기시키며 이번에는 저축을 하자는 둥 아니면 가족들을 위해 쓰자는 둥 심지어 목사님에게 선물 하나 사보자는 둥 어르고 달래며 어찌 해보려 했으나 별 수 없었다. 자꾸 자신의 외모를 이름 있는 무엇으로 치장해야 안도한다. 안경도 모자도 썼다 안 썼다, 또 새로 샀다가 처박아두었다가 안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병적이다 싶은데 뭐라 말해주다 그 말이 고스란히 내 이야기라는 데서 놀랐다. 나야말로 열등감덩어리가 아니던가!
겉치레와 같이 옷치레 말치레, 표정, 친절, 예의 그 모든 게 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열등의식에 따른 것들이 아닌가. 있는 그대로 분수에 맞게 감사하며 살면 될 텐데, 우리 안의 열등감은 그게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오전 내내 아이의 그런저런 면을 설득하느라 말을 많이 해서일까? 종일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그게 어찌 아이만의 문제이겠나? 이해와 안타까움이 계속 이어졌다. 우스갯소린지 모르겠으나 흑인이 부자가 되면 캐딜락을 타고, 허위 또는 오만 가지 박사 학위가 난무한 것들이 목사들의 세계라는 소리를 들었다. 감투를 좋아하고 이력서에서 약력을 보면 줄줄이 무슨 직함이 그리도 한도 끝도 없는지. 하긴 병원에 병자가 몰리듯 교회에 열등의식의 사람들이 몰린다는 말에 일리가 있다. 갈 데가 없고 그것을 존중해주고 받아주는 데가 그래도 교회다보니…. 그것이 도드라져 심한 경우 예언자가 늘고 온갖 직함이 난무하며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마치 자신이 뭐나 된 것처럼 남을 판단하고 예언하듯 비판하는 경우나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더하셔서 은사를 체험하고는 이를 마치 자신만의 훈장처럼 여겨 어딜 가나 그것을 자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는 명목으로 마치 남다른 자신을 과시하면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열등감을 포장하는 것이다. 가만 보면 성경의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 아니겠나? 자신의 처지를 두고,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또는 그 어눌한 말투 때문에,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 자격을 운운하며,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3).” 그 누구보다 유명한 저가 그러했음은 우리 안의 열등의식이 얼마나 고질적인가, 하는 것을 반증하는 예이다.
신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하면 바울도 다를 게 없었다. 저의 열심은 남들보다 못한 외모 때문이었거나 ‘육체의 가시’라 표현한 장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회심하여 사울에서 바울이 되고도 저는 번번이 예전에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본다. 거기다 저는 딱히 언변이 좋은 사람도 못 되었던가보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 11:6).” 어쨌든 우리 안의 이 모든 것이 죄로 인한 것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아이엄마가 큰 교회를 전전긍긍하며 뒷자리에 머무는 까닭도 실은 누가 자신의 처지나 사정을 알까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임을, 나와의 관계에서도 할 말만 하고 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우리의 열등의식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져갈 때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인 느낌이고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한데, 나는 언제부턴가 나의 열등감을 선용할 줄도 안다. 숨기지 않고 또는 그것을 무마하려고 다른 무엇으로 포장하려 애쓰지 않는다. 되레 나의 불안증이 또는 장애가 가난이 능력이 부족함이 누구를 이해하고 마주대하는 데 힘이 되어준다. 다시 말해서 점점 더 자유함을 느낄 수 있다. 더는 가난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그곳의 아이들이 집으로 와서 공부방으로 운영하는, 아내는 아이들을 이제 전과 다르게 이해하고 보듬고 가르친다. 즉 우리는 점점 더 ‘주의 마음’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전에 같으면 ‘돈 받고 하는 일’에 그쳤을 것이 언제부턴가는 같이 울고 같이 웃고 하면서, 우리도 모르게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기를 사모한다.
또는 나에게 두시는 가시로 나는 가시에 찔리며 아파하고 있는 누구를 또는 누구의 누구를 이해하게 되고 안타까워하며 심지어는 나의 마음으로 다 담을 수 없어 주의 마음을 더 바라고 사모하고 의지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나의 자의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자아다. 새로 만들어진 믿음의 눈이다. 하나님이 저를 내게 보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무슨 수로 저들을 대하고 위할까? 말씀밖에는 없어 성경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를 바라며 더욱 더 성경으로 다가가 할 말을 찾고, 해야 할 행동거지를 점검하며, 이게 맞나? 싶어서 다시 또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성령은 그러한 나를 깨우치신다. 아이에게 말해주면서 실은 내가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의 열등감을 운운하기에 앞서 내 안에도 여전한, 그래서 사뭇 틈만 나면 비집고 올라오는 겉치레 말치레 위선적인 친절과 배려를 회개한다.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나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그러니까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예전의 나는 죽었다. 어느 날 죽은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더욱 내 안에는 하나님을 닮아가고 싶은 선한 욕심이 생겨난다. 이는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지금의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든든한 보험 같은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비밀의 무기다. 나는 내가 아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신나고 황홀하며 경이로운 고백인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그렇게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에 안도한다.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 만드신 것이라는 데서도 다행스럽다. 그러자고 예수께서 그리 오셨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20).” 같은 맥락에서 누가 토요일에 오고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그게 참 기쁘다. 물론 한편으로는 나의 고질적인 불안이 또는 불편함이 자꾸 속을 울렁거리게 하고 순간순간 긴장을 하게 만든다. 어제도 아이에게 이런저런 얘길 그러려니 하고 말았어야 하는데 자꾸 하고 나서는 마음이 어떠했는지, 갑자기 또 속이 뒤틀려 설사를 했다. 참 지겨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아는 나로 사는 것이다! 나의 결함을 또는 숨기고 외면하고 아닌 척 굴며 위선을 떨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결점을 더는 숨기지 않는다. 약함을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그것으로 하나님이 선히 선용하신다는 데 따른 확신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게 아니라 본래 그러시려고 특별한 존재로 삼으셨던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도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왜냐하면 나의 연약한 데서 주의 능력이 나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그러면서 올바른 대응을 하려 한다. 노력에 의한 과도한 수고가 아니라 이를 받아들임으로 전혀 새로운 감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약점과 저들이 감추고 있는 열등감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의 마음으로 마주대할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된다. 어찌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포용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않는다. 교회가 좀 이래야 하지 않을까? 목사면 누구처럼 좀 이런 데도 가고 저런 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당위에서 벗어났다. 그저 나는 내 몫의 사명을 감당할 뿐이다. 누가 뭐라든지, 심지어 여기가 혹시 이단은 아닌가? 하는 오해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좀 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보내시는 아이들을 또는 한 영혼을 전심으로, 하나님처럼 대할 수 있었으면! 하는, 사모함. 문득 오늘 말씀은 이것까지도 주께 맡기라고 하시는 것 같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