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왕하 13:22-23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사사시대에나 열왕들의 시대에나, 우리의 되풀이 되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함과 그에 따른 형벌과 우리의 회개와 주의 긍휼하신 용서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북이스라엘 여호아하스의 통치 기간 내내 아람 왕국의 계속적인 침략이 있었다. 이에 그 아들 요하스는 우상숭배 중에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극진이 대접하였고 하나님은 그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게도 하셨다. 죄의 뿌리는 어찌 꺾을 수 없는 것이어서 거듭 우리를 충동하고 들쑤셔 조금만 틈을 보이면 여지없이 공격해온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감정이 있어 수시로 요동치는 것이어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이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하게 하신 말씀을 엄중히 들어야 한다(26). 이는 결국 하나님의 새 사람을 입은 수밖에 없다(24).
그래서 나의 좋은 일과 가운데 하나는 ‘이제 뭘 하지?’ 하는 일정을 삼간다. 아침에 일어나 여느 날과 같이 글방으로 나갔다. 교회 안은 공휴일 오전이나 주말 오전이 가장 좋다. 그리고 늘 하듯이 묵상글을 다시 읽고 설교원고를 다듬고 소리 내어 읽으며 커피를 마셨다. 전날에 친구의 술주정 때문이었는지, 아침에 쓴 묵상글이 그러해서 그랬는지, 소리 내어 읽다 흐느껴 울기도 하면서. 나는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하여 주께 아뢸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고, 오늘에 이르러 주의 뜻을 더욱 바라고 사모하게 되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는 친구를 생각하였고 내 곁에 두시는 누구의 처지와 누구의 안타까운 일과 누구의 처량함에 대하여 주께 말하였다.
이는 말씀이 일컫는 대로 틈을 주지 않는 일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 문득 드는 생각이 내게 두시는 주의 마음이지 내 의지나 내가 그 마음의 주체가 아닌 것이었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결코 다 멸하지 않으신다.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왕하 13:22-23).” 그리 아니할 수 없는 저희의 악함 중에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는 이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신다. 그냥 그것으로 끝내시는 이가 아니시다.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의 출처는 그런 게 아닐까?
단지 저희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렀던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나의 지난날의 처지가 처량하여 공연히 마음이 우울했던 것도 아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내가 왜 우는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저런 가운데서도 친구가 다시 교회로 가고 성경공부를 했으면 하고, 또 누가 이단 교회에 빠져 19년이나 휘둘리다 싫증을 내고 몇 년째 교회를 멀리하며 지냈던 것을 다시 주의 은혜로 붙드시고 교회로 인도하심과 말씀을 사모하게 하심에 대하여. 나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그럼에도 멸하기를 기뻐하지 아니시고 돌이켜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의 눈물이었다. 결코 이 말씀은 그저 말과 지혜로 아름답게 꾸며지는 게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를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 증거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자신의 학식도 또는 경험도 그에 따른 확신과 소신 따위의 신념으로 그리 행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사도의 결연한 고백이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딸애가 모처럼 친구들과 만나 서울로 놀러갔다가 광화문에 모인 군중들에 질겁하고 시내 외곽으로 빠졌다. 정치적으로나 또는 자신들의 진영논리에 따라 그리 행하는 것이야 것 또한 민주주의의 하나일 수 있으니 그런다 쳐도 왜 거기에 목사가 선봉에 서고 말씀을 운운하고 어디서 헌금을 거둬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소신을 확산하는지 모르겠다. 이를 들쑤셔 악용하는 정치가나 쓸려 다니는 군중 심리로 그 앞에 모여 입으로는 찬송을 양 손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며 구호를 외치는 군중의 심리를 어쩌면 좋을까? 교회가 사회의 골칫덩이가 되고 근심이 된지 오래다. 나는 딸애가 시내 외곽으로 빠져 식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기까지 안절부절못하였다.
사도의 외침도 그리 읽는다.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우리가 어쩌자고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하고 자신의 소신을 들먹이는 데 쓰고, 즉자적 대중을 선동하듯 교인들을 들쑤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사람들을 충동하는 것이다. 이런 시국에 나는 누차 느끼고 강조하고 내 곁의 사람들에게는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를 나는 작정하고 저희로도 부탁한다. 온갖 가짜 뉴스가 난무하고 자신의 의견이 사실 없이 굳어져 그저 떠도는 말로 회자되고 뭉텅이져 마치 그런 것 같고, 그래야 할 것 같은, 떠도는 말의 시대다. 아내도 누구한테 들었는지, 우리 나라에 빨갱이가 많다는 둥, 남한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은에게 남한을 통째로 넘기기로 했다는 둥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과 말 사이에서 말을 듣다보면 말은 어느 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말들이어서, 말이란 그렇듯 안개처럼 음흉하고 흉악한 것이 되었다.
‘그럴지 몰라’라고 한 말이 ‘그렇다더라’ 하는 말로 둔갑하여 어느새 ‘그렇대!’ 하면서 급기야 ‘너는 어느 쪽이야?’ 하는 식으로 몰아가 진영논리에 함몰되게 한다. 아닌 것 같아도 이미 때는 늦어서 그런 것 같고, 그렇다고 확신하고, 그러면서 정작 자신 안의 의문들은 묻혀 말과 말 사이에서 정작 자신의 말은 사라진다. 우리 사회의 이 고약한 현실이 얼마나 기약없는 말들에 휘둘려 정신을 잃고 있는지 모른다. 정작 그 자리에 있으면서 왜 있는지 모르고, 그게 그럴 정도인가, 의문이 들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렇대, 그러더라, 하는 것이 대체로 나이든 어른들 사이에서 선동되어 확산되는 까닭은 저들 안의 공포 때문이다. 6.25를 겪은 세대나 그 이전 세대들은 치를 떨며 무조건 북한은 다 괴물이고 원수인 것이다. 그 경험치를 가지고 더 이상 추정이 아니라 확정이 되어 사실 근거도 없는 집단의 선동에 끌려다니는 즉자적 군중으로, 구호로 쓰이는 것이다. 말의 추함에 대하여, 그 말이 그 어떤 칼과 총보다 무섭다는 것을 우리 현실은 허울 좋은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에서 보란 듯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로마의 시절에는 안 그랬겠나? 당장 끌려가 그 사람을 불태워서 시내를 밝혔을 정도이고 그런 상황에 그리스도인으로 그 믿음을 굳건히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공포스럽고 흉흉하여 말과 말이 난무하는 가운데 설왕설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어느 시대나 사사들의 시대나 열왕들의 시대나 오늘 우리 사회나, 굳건히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 말이 그렇지 실제 그 확신을 내 의지나 나의 소신과 확신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겠나? 그래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우리는 곧 하나님의 능력에 있어야 한다. 내 의견으로가 아니다. 우리 교단과 교계의 입장에 서는 일도 아니다. 어떤 한 인물의 됨됨이로 붙들려 같이 나서서 싸울 일도 아니다.
나는 오늘 아침, 부디 나의 마음이 또는 생각이 세상을 떠도는 말에 취하지 않고, 내가 일삼는 나의 의지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말씀으로 성경만으로 굳건하여지기를 기도한다. 고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그리하여 나의 남은 날 동안에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8).” 이는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3).” 고로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 오직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