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왕하 16:8-9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편 60:12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진 아하스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성전의 것을 가져다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는 것을 본다. 저들의 도움으로 당면한 전쟁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왕하 16:8-9).” 종종 그게 왜 나빠?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럴 수 있지 않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 보다 앞서는 예배, 기도, 헌신과 봉사, 그 모든 노력은 다 문제다. 우리 안에 이는 생각, 그게 왜 나빠? 할 때의 그 모든 앞서는 것이 나쁘다. 구원의 실제를 살자. 아이와 남아 성경공부를 하며 그것은 오로지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것들로 정리하였다. 내가 하려는 선한 의도가 아닌 것이다.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이가 오겠다고 한 것이다! 종교적인 게 싫고, 글방이 교회여서 싫고, 목사가 엄마의 선생이어서 싫고, 상담이니, 성경공부니 그 어떤 관여가 싫다고 하던 아이였다. 무엇보다 그 후 극심한 무기력에 빠져 한 달에 한두 번도 집 밖으로 나서질 않고, 밤낮이 바뀌어서 거꾸로 사는 삶이 이어졌다고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하는 저의 물음에 난들 아나? 난감하여서 주님께 의뢰할밖에. 주께 묻자. ‘알바’로 오게 할까? 그러니 무슨 일을 시킨다? 무질서하게 쌓인 책장 정리부터 하게 할까? 시급 만원? 하는 식으로 우리의 구상은 터무니없었다. 그런다고 갈까요? 그러게 오겠니? 서로는 회의적이었으나 그러므로 주를 의지하는 수밖에. 토요일에 누가 와서 성경공부를 하기에 앞서 ‘기도 노트’에 아이 이름을 적었다. 책장을 사진 찍어서 아이엄마에게 보냈다.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모르겠고, 우선은 서로 어색하니까 책장정리부터. 다음은 원고를 주고 타이핑, 또는 교정보는 것을 제안하였다.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일 날 아침, 아이가 하겠다고 하는 연락이 왔다. 그것도 주말 빼고 5일, 하루 두 시간씩 오후 두 시부터 네 시까지. 주급으로 주는 것으로 그건 아이엄마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서 나는 늘 놀란다. 마음이 벅차면서도 어리둥절하였다. 아니 왜 와? 누구를 만나게 하시려고 추석날 꼼짝 못하게 하신 일에서부터 저를 만나 실제 저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게 된 일에서부터 뜬금없는 아이와의 만남이라니! 벌써 2년이 지난 얘기다. 그때는 한꺼번에 두 아이가 온다는 데 자신이 없었다. 하나로도 헉헉거리는 위인이라 이를 어쩌나싶었다. 그렇게 한 아이를 잠시 두셨다가 이쯤 되어 연결하시는가? 말씀 중에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두고 서로 기도하기로 하였다. 더는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아이가 집 밖으로 나와 자발적으로 오겠다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아이와 남아서 성경공부를 하며 그렇듯 구원의 실제를 기뻐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실은 내가 앞서 나설 게 하나도 없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묵묵히 우리에게 두신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맡을 뿐이다. 것도 주가 하신다. 나는 솔직히 두려움이 앞서고 여러 생각이 먼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어떻게 하지? 저 혼자 복잡해진 머리를 흔들며 아이와 말씀을 읽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다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마음뿐이다. 내가 앞서 무얼 하려는 모든 것은 그래서 위험하였다. 주께서 앞서고 주가 하게 하신다. 우리는 다만 주를 경배할 뿐이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존하시는 이시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다. 어떠해도 변함이 없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공로도 영광도 없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 115:1).” 구원의 실제는 그 단계별로 찔림이 오고, 비로소 우리가 피조물인 것을 알게 되며, 고로 믿음으로 인내하고 인내의 소망으로 나아가게 한다. 때론 힘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울면서도 그 고단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두려움이 앞서고 어떤 불안이 먼저 엄습하면서 안 했으면 싶은 마음에 먼저 사로잡히면서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이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의문은 그야말로 피해야 할 변명거리일 뿐이다. 가만 보면 내가 하는 게 하나도 없다. 그냥 나는 여기 있을 따름이다. 생각하고 저를 두신 이를 바라는 일뿐이다. 반드시 그 일은 그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여러 생각과 그에 따른 구상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하였다.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며 나는 나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얻은 것이다. 주만 흥하시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그러다 말면 그만이고,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나는 손 안 대고 코 풀 듯, 아이엄마의 말처럼 마음대로 부려먹으세요! 하는 말에 풋, 하고 웃었다. 어쩌면 그 말 속에 진리가 담겨 있어서 말이다. 그게 될까? 하는 따위의 우려는 내 몫이 아니고 나는 그저 묵묵히 따르는 수밖에.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강건하여지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람으로 되어간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그러니 이제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왜냐하면 나의 약함에서 주의 강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주가 하신다. 시작하신 이가 이끄시고 이끄시는 이가 다스리신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내 안에 이는 두려움부터 실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아이와 성경공부를 마치고 배웅하며, 요즘은 좀 어떠냐? 하고 물었을 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해요! 하는 아이의 대답이 기특하였다.
너무 몰두할 거 없다. 아프면 아픈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주께 맡김으로 주께서 붙드신다. 우리의 요동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오늘에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게 두시는 이 마음이 헛되지 않으며 나의 수고가 오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인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시 6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