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전봉석 2019. 10. 9. 07:06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4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 모든 산당과 우상을 허무는 장면은 신난다. 심지어 모세의 놋뱀을 그날까지 숭배하는 것을 부수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그러니 오늘 날 무엇을 발견했고 그것을 어디에 극진히 모셨으며 이를 성지로 삼아 순례의 길을 떠나는 둥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는 모든 것은 우상이 되고 이를 법도로 지키는 데는 숭배가 된다. 줄기차게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에 대하여 주의 이름으로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는 주의 권능을 더해달라고 기도한다. 먼저는 주의 마음이고 그와 같은 주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오늘 우리가 처한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바란다.

 

스스로를 이처럼 낮추고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1)” 우리는,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6).” 결코 다른 복음은 없다. 더 나은 방도도 없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7).” 세상이 너무 혼잡하고 그래서 그릇됨이 완고하든 외면하고 무관심함이 난무하든,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바로 서자. 믿음에만 굳게 서자. 감사함으로 서자.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7).”

 

혼자 되뇌듯 아이 앞에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는 또 우산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챙기지 못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자책하였다. 그래서 장애인 것을 자꾸 뭐라 한다고 되겠나? 괜찮다. 누가 필요한 사람이 주워서 잘 쓰겠지! 하고 타이르다 이 하찮은 것 같은 데서 서러워하는 마음인데, 하물며 어디에 흘렸는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정상이라 여기는 이들의 영혼을 두고 안타까워하였다. 다그쳐 아이를 뭐라 할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이는 새로 산 우산을 잃어버렸을 뿐이지만 누구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감사가 그 안에 도식적으로만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나는 자꾸 아이에게 괜찮다, 괜찮다 하며 그거야 말로 그럴 수 있고 괜찮은 것이라고 위로하였다. 시무룩하고 자책하는 일이 병적이라 나는 그것이 더 위태로운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이 좀 멀리 걸어서 점심을 먹었다. 길거리에서 차를 한 잔 같이 하고, 버스 태워 출근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내게 두시는 일이라.

 

누구나 그 안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 어쩌면 우리 안에 이는 불안과 자책과 수치심까지도 실은 그 영원을 아는 우리 영혼의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저 이 땅을 사는 정도의 존재라면 뭐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이겠나? 나는 은연중에 아이 앞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다. 전날과 같이 아이는 오후에 왔고 책장을 정리하느라 덩달아서 책들을 뒤집어엎었다. 몇 수레를 내다버린 지 모른다. 스무 살 대학 때 산 것으로 문득 망설이게 되는 책도 많았다. 그렇다고 가지고 있은들 먼지만 덕지덕지 쌓여 꺼멓게 얼룩이 졌을 정도인데도 미련은 남아 한참씩 망설이곤 하였다. 버려야 하는 것과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마음으로 어렵기도 하였다. 하긴 아이 덕분에 이 일도 벌어졌다. 계속 미루고만 있던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보내시는 아이들이 소중하다. 저들에게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나에게 저들이 필요해서이다. 감사한 것은 다들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누구는 휴일인 내일도 와도 되나 묻고, 누구도 왔으면 하는 것을 그저 고맙게 여겼다. 오란다고 오겠으며 가란다고 가겠나? 다시금 느끼는 일이지만 내가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에 증인으로 세워지는 것은 참으로 심박하다. 이쯤인가? 싶은데 더 깊고, 여긴가? 싶은데 아직 멀었다. 나는 이렇게 해야 하나? 하고 궁리를 했으나 저절로 이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어찌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가령 아이와 책정리가 끝나면 이제 무슨 일을 핑계로 알바를 시키나, 생각이 많다. 아버지 원고를 옮겨 적게 할까? 내가 전에 미뤄두었던 글을 다시 정서하게 할까? 어디 읽으며 밑줄 그은 책을 옮겨 적으며 요약하게 할까? 그렇다고 잔심부름을 시켜야 한다고 뭘 딱히 할 일이 많은 사람도 아니어서! 나는 늘 생각에 시달리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다루실 것을 또한 안다.

 

아이와 둘이 책 정리에 구슬땀을 흘리고 앉아 잠시 흐르는 정적을 그냥 두었다. 꼭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하고 뭔가를 이어서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서로 같이 있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 내일도 올까요? 하는 아이 말에 의외였다. 그 안에 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찌 저런 아이가 은둔 아닌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혼자 창밖을 보며 생각하였다. 내가 어찌 작정을 하고 기를 써서 해야 하는 일은 없다. 오늘 시편의 말씀이 그러한 나를 붙드신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72:18-19).” 나는 다만 여기에 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주가 이루시는 일에 나는 다만 증인으로 서 있을 따름이다.

 

아이들이 안고 사는 여러 고충과 어려움에 대하여도 내가 어찌 해결하고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시는 말씀에 붙들릴 따름이다. 엄연히 우선이 있고 나중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22:37-39).” 주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고 그 사랑으로 주께서 주의 마음을 주실 때 이웃 사랑도 가능한 일이다. 그것까지도 내 의지나 내 노력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내 사랑이 아니다. 아내와 딸애와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항상 아뢰는 말이 주의 마음을 달라는 것이고 주의 사랑으로 하게 하시라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 또한 저들이 성가시고, 정 떨어지고, 싸가지 없고, 늘 서운함과 답답함만이 먼저 앞서는 것이어서 우리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성경으로만 바른 관점을 주신다. 나는 이제 그리 확신한다. 성급한 마음이나 아이와 함께 성경을 두고 말씀을 묵상하며 속엣 얘길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아직은 어색하고 뻘쭘해서 그저 책장만 정리하고, 같이 그러느라 밤새 여기저기 파스를 붙이고 끙끙 앓았다. 것도 일이라고. 나의 이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새삼 깨닫는 것은, 오직 주가 하실 것이다. 아둔하고 몽매한 나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그저 아이에 대한 값싼 동정뿐이라,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하고 여느 꿈을 찾아 대학에도 가게하고, 그러느라 자신에게 주신 삶을 값지고 소중하게 살아드릴 수 있도록!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32:17).”

 

왜 슬펐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음으로 나는 온전히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뢰할 따름이다.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18).”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저 아이를 감당할 수 없다. 누구의 치대는 마음을 어찌 슬기롭게 다루어야 하는지 난감하다. 나의 이 아둔하고 미련한 마음을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4:13-14).” 나는 오직 주만 의뢰고 경외하며 주님 앞에만 나를 부복하는 삶이기를.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72:11).”

 

그러므로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