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왕하 24:20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시편 78:10-11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바벨론의 1, 2차 침공으로 멸망의 기로에 서서도 유다는 우상숭배를 계속하였고 예레미야의 충고에도 친애굽정책을 펼쳤다. 어쩔 수 없다는 말, 갈 데까지 가 봐야 안다는 말처럼 무서운 게 없다. 오늘 날에도 ‘다른 복음’을 좇는 일에 대해 오히려 그 극성이 말이 아니다. 우리 동네에도 무슨 교회니 무슨 이단들이 그처럼 득세하는지,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집요하게 설파한다. 또는 설문조사하듯 인상 좋은 젊은이들을 내세워 서로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동원하여 현혹한다. 결국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왕하 24:20).”
말씀 앞에서 주춤한다. 점점 대범해지는 세상이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종종 드는 생각은 세상은 참 희한하다.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된다. 저들이 그때마다 벌을 받고 눈앞에서 망해야 소위 말해 정의가 살아있다고 하겠는데 이건 오히려 그 반대 같으니.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12).” 그러니 세상이 눈 하나 깜빡하겠나? 하나님의 말씀은 위축되고 ‘다른 복음’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14).” 그러한 현상 앞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성경은 마치 염세적으로 증언하는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9:2-3).” 그럼에도 성경은 오늘 우리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일이 얼마나 귀하고 거룩한가 하는 것을 말해준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4).”
또 누가 자살했다. 어떠하든 나는 저의 극단적인 선택이 가슴 아프다. 오죽하면 그랬을까하는 심정이다. 다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사람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선택이 그것이지 않겠나? 나는 낯익은 얼굴을 보며 저의 앳된 모습에서 더욱 비통함을 느낀다. 죽음으로 끝이다. 다 잃는다. 더는 거기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없다. 오죽하니 성경은 죽은 사자보다 산 개 낫다고 할까? 부디 살아라. 살아서 주의 은혜를 구하고 맛보아 알라. 어쩌면 나는 그런 심정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 마음에 불행한 기억이 가득하다.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와 핑계와 아쉬움이 뒤섞여 아이를 괴롭힌다. 한 아이는 이렇고 한 아이는 저렇고 둘이 다른 것 같아도 다를 게 없어서 그 부모의 모순된 삶이 고스란히 그들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죄악의 굴레가 참으로 혹독하다. 그럼에도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5).”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은 아이가 온다. 와서 또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낸다. 설마 하겠나? 싶었는데 아이가 주말에 200매 넘는 원고를 다 읽어왔다. 본래 책을 안 읽는 편인데 재밌게 읽었다며 호응하였다. 그런 아이를 아이엄마도 놀라워했다고 하니, 나 또한 아이의 적응이 감사할 따름이다. 결국 내 이야기를 아이가 쓰기로 했다. 그러려고 여태 그 모자란 이야기를 없애지 않았던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누구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찌 그만의 이야기로 그치겠나? 아이는 내 이야기에서 자기 이야기를 읽어낼 것이고 급기야 우리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하시려고 오늘에 두셨다. 소망이 있다. 아직 살아서 살았다는 것은 여지없이 그래도 소망이 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암울하게 이 세상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는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결코 염세적으로 될 대로 되라고 살길 원하지 않으신다. 나는 나의 이야기에서 이것이 아이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어릴 적 그 모순된 생각과 감정들 속에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무슨 낭만처럼 우리 곁을 떠돌지만, 살아서 산 자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삶이 얼마나 크고 복된 일인지를!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누가 나에게 늘 얼굴이 밝다며 궁금해 했다. 또 누구는 통화를 하다말고 목소리가 상당히 힘이 있다며 밝고 명랑하게 느껴진다며 비결을 물었다. 나야말로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내 식물을 먹고 내 포도주를 마실 뿐이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 9:7).”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한쪽 다리가 아프면 다른 쪽 다리로 한 팔이 시원찮으면 다른 쪽 팔로 살면 된다. 나는 자신 있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주시는 대로 살 뿐이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이를 어떻게 아이에게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 의복을 희게 하고 머리에 향기름을 바를 뿐이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8).” 단정한 옷차림과 깨끗한 몸가짐으로 살면 된다. 있으나 없으나, 더하나 모자라나 하나님이 그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즐거울 따름이다.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읽어줄 수 있을까? 못하겠어요, 하고 말 것 같았는데 해보겠다고 하고, 묵묵히 하고 있으니 것도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 주신 날 동안에 더하신 이들과 함께 수고 하고 얻은 몫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복되지 아니한가. 평범한 생을 즐거움으로 알자. 주 안에서 그 어떤 생도 평범하지 않다. 구구절절 사연이 많으나 그 모든 게 절대적인 것이라, 누가 누구보다 더 불행하고 더 행복하지 않다. 그러라고 하나님이 나를 저 아이들 앞에 두시는가! 목사님은 안 힘들어요? 선생님은 괜찮아요? 하는 물음 앞에서 나야말로 왜 괜찮고 왜 안 힘들겠나? 그럼에도 힘들고 안 힘듦의 문제가 아니고, 괜찮고 안 괜찮고의 문제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긴 생이다.
그 몸으로 살고 그 형편으로 사는 것인데, 그것으로 주의 은총을 누리고 향유하고 나눌 수 있게 하심이었다. 나는 티내지 않고 아이 앞에 앉아서 아이가 그리 따라오고 함께 하는 시간이 참으로 감사하고 귀하였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3:13).” 나는 저 지혜자의 말이 단순히 말장난이 아닌 것을 잘 안다. 돌아보면 나야말로 참 특별하고 특이하고 유난히 그러그러했던 시절이 한둘이던가? 그것을 못 견디겠어서 일일이 글로 쓰고 또 쓰고 지웠다가 고쳐 쓰면서 하였던 일이 오늘에 와서 어떤 아이의 위로가 되고 ‘한 번 해볼게요.’ 하는 희망으로 읽혀지고 전달이 되어줄 줄이야! 그 지난 날 어느 것 하나라도 그게 어디 내 것이었나?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이제 또한 알았다! 나는 저의 말에 ‘아멘’ 한다.
하나님이 내게 선물로 주신 것, 그것으로 오늘에 이르러 내가 주의 쓰심에 합당할 수 있게 될 줄이야! 그러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이는 내가 살아서 여태 살아오는 날 동안에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 것은 그저 한탄과 비통함에 젖어 우울해하고 슬퍼하며 죄악 가운데 거하였던 것뿐!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음에도 그때마다 주께서 함께 하셨고, 나를 돕는 이로 늘 내 곁을 떠나지 않으셨음을. 나는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다. 그 우울하고 좌절가운데 있는 마음에 주의 놀라운 선물이 가득할 것을. ‘한 번 해볼게요.’ 하고 아이는 내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로 쓰기 시작했다. 망치면 어떡해요? 못 하면 어떻게 해요? 하고 묻는 아이에게 버려져도 그만일 이야기인데 아무렴! 그러면서 아이는 아이의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고 그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시 78:10-11).” 하지만 그 자식 세대의 이런저런 일들이 결국은 저들을 돌이켜 주를 향하게 하시기를.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