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전봉석 2019. 10. 19. 07:16

 

 

다 다윗의 아들이요 그들의 누이는 다말이며 이 외에 또 소실의 아들이 있었더라

대상 3:9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3:18

 

 

다윗의 일가를 살펴보다보면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늘 함께 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앞서 열왕기서 곳곳에 드러나는 모든 후손의 족적은 말씀을 따르는가, 우상을 바라는가에 따라 확연히 갈리었다. 그러면서도 그 의미가 무색한 것은 모두가 언제든 가시적인 우상을 섬기는데 몰려가곤 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강건하기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하지만 엄연한 것은 영혼이 잘됨 같이. 영혼이 무언가? 우리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자아를 통칭한다. 마음이고, 정신이고, 내면의 실체로써 생령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사람에게만 두신 특이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다.

 

그 영혼이 잘 돼야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것이 유익하다. 거꾸로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데 영혼이 잘 되지 못하면 이는 도루묵이다. 가령 성경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그 예시다. 저는 모든 게 잘 되어 창고를 더 짓고 스스로 이른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12:19-20).” 이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모든 잘됨은 오히려 꽝이다. 그래서 시인은 갈급함으로 주를 찾았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우리 영혼이 강건한지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그건 아주 간단하여 내 영혼이 하나님으로 기뻐하는가? 하는 것이다. 저 아이가 하나님 안에서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으면, 하고. 누가 주를 더욱 바람으로 곁의 누구에게 나누고 더하고자 하는 마음이 복되기를. 그와 같은 바람은 하나님이 기뻐하기를 원하고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범사에 잘 될 때 주를 찾는 데 소홀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안다. 열에 아홉은 잘 되면 이상하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세상을 좇는다.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을 둔다. 열왕들의 족적이 그러했고 내 곁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공식처럼 그러하다. 어디서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의 추이를 살폈더니 열에 아홉은 불행해졌고 심지어는 끔찍한 괴물이 되었다. 또 하나는 인생의 역경을 만났을 때 어찌 반응하는지 자신을 보면 안다. 대부분이 좋을 때는 좋은 사람 행세를 한다. 저절로 교양이 넘친다. 우아하다. 돈이 사람을 만든다는 소리가 버젓이 흘러 다닌다. 그러다 삐끗해서 풍랑이라도 몰아치면? 모두는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사람 같다.

 

영혼이 강건하기를. 그리하여 오늘에 두신 이런저런 일들이 주 앞에서 범사에 강건하기를. 아이와 같이 아이가 쓴 글을 읽었다. 앞서 프롤로그를 적어보기도 하였다. 누구 편지글도 써주었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그러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텐데, 나는 저의 마음에 있는 누구에 대한 사랑이 부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아이는 이런 작업을 같이 하였다. 그때마다 주가 나의 걸음을 인도하시기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이 말씀이 오늘 우리 귀에 응하게 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4:18-19).”

 

아직은 아이가 엄마 차를 타고 오고, 여전히 그 의존도가 높아서 뭐라 하기 어려워 마음만 살필 따름이었다. 대신 아이에게 드러내며 함께 나누는 이야기와 그 사연들이 성도간의 교제와 같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나는 주의 영을 의지하며 전심으로 대하였다. 더디 믿는 자에게는 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것은 내 곁에 두시는 일이라. 내 말,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앞서는 모든 나의 주장은 허사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러라고 오늘 나에게 저 아이를 붙이셨다. 하찮은 나의 이야기가 값진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광야의 소리였으면!’ 그리하여 오늘 교회에 두신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3:15).” 그러면서도 나의 감정은 말랑거렸고 그리움은 여전하였다. 아이가 필사하고 옮겨 적은 아직 미완성된 첫사랑에 관한 글을 가져왔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오두막이 한 칸씩 있다. 누구는 이를 추억이라고 하고 누구는 이를 그리움이라고 하여, 누구는 이를 유년시절이라 하고 누구는 이를 첫사랑이라고도 한다. 나는 여기서 이라는 접두사가 붙는 칸칸의 방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도 여전히 어렵다. 첫사랑, 첫눈, 첫아이, 첫등교, 첫직장, 첫월급이에 접두사 이 붙기 전의 사랑과 눈과 아이와 등교와 직장과 월급은 일반화되어 아무 감각도 주지 못하다 그 앞에 을 붙이면 문득 생소하면서도 뭉클하여져 가슴 어디가 묵지근하니 아프다.

 

그럼에도 그리움이란 그렇듯 지친 영혼의 쉼이 되었다가 휴식이 되었다가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다그치는 억압이었다가 윽박지르는 고함소리와도 같다. 너무나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나의 첫사랑에 대하여, 이를 소설로 썼다가 시로 옮겼다가 수필로 가져왔다가 도로 던져두어 묵은 먼지가 덕지덕지 쌓였던 것을 새삼 풀어내어 이제 와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은 것은, 내가 그만큼 나이 들어서도 아니고 무심히 그리움에 사무쳐서도 아니고, 다만 도무지 쉴 수 없는 나의 오두막이 불편하여서도, 여전히 나는 할 말이 많아서도, , 나의 이 이중배반적인 게으른 영혼이여!

 

여전히 시대는 암울하고 저마다 어쩔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등짐으로 이고 지고 씨름하며 사는 세월에서 나는 나의 몽매한 육신을 이끌고 살았던 나환자촌에서의 유년을 그리워하다 사랑하다 울음을 짓기도 하면서. 그러자면 이내 나의 첫사랑인 저 소녀에 대한 나의 미안함에 대하여 조금은 덜어내고 싶은. 저도 지금은 어디서 중년의 나이를 살며 가끔씩은 그때의 일을 떠올릴 텐데, 저의 오두막은 어떠한지. 들어가 종종 쉼을 얻고는 하는지.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으나, 그때는 절실하였고. 감히 말하건대 사랑한다, 나의 그 첫사랑으로 오늘을 배웠다는 이 볼품없는 말들로 어찌 좀 보상이 되기는 하겠는지.”

 

쓰다 만 글을 놓고 먹먹해하다 우선 또 접었다. 이제는 말씀으로만 살기를 바라지만 이는 결코 허상이 아니라 일상이고, 일상은 지나온 시간을 외면하고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나의 문장은 끝맺음을 못하고 늘어지고 늘어져 한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이는 엄연하여서 말씀을 붙들고 나온 아브라함과 환경에 의해 따라나선 롯의 생은 달랐다. 기어코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바라보고 대처하고 해결하는 방식도 달랐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8-9).” 나는 문득 쓰던 글을 멈추고 아이를 돌려보내고 말씀 앞에 앉았다. 내 영혼이 강건한가? 영혼은 주가 거하시는 성전이다. 내 안의 하나님의 집이다. 그 형상과 모양이다. 말씀을 의지할 때 어부 베드로는 목수 예수의 말씀을 따랐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5:5).”

 

내가 아이를 두고 또 나의 아이 적의 첫사랑을 운운하며 이를 글로 정리하는 것은 그 안에 오늘이 담겨 있었다. 다윗의 일가를 그 이름을 따라 읽다보면 그 면면에 얽히고설킨 사연은 차치하고 단순명료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행여 나는 나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을까하여,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하여.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아이였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때론 내가 저 아이에게 까마귀가 되어야 한다. 주의 음식을 날아다 주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왕상 17:6).” 그렇듯 묵상한 글을 누구에게 전하고 아이에게 들려주고 함께 나누면서, 부디 언제쯤 이 아이의 마음에도 주의 빛을 비출 수 있을까? 단지 저의 관심을 유발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아프다. 아팠고 여전히 아픈, 나는 접두사 자를 붙여 일컫는 모든 것을 통회한다. 주가 함께 하셨음에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지! 주의 일에 앞서 우선은 은혜가 항상 먼저였다. 나의 유년을 돌아보면 모든 게 암울하였던 것 같으나 그 칸칸마다 쉼이 있어 내 영혼의 오두막과 같다.

 

이 모두는 주의 은혜라.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83:1).” 부디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13).” 내 안을 휘젓고는 하는 그리움이 단지 그러하였노라 말하지 않게 하시길. 그 안에 무궁한 주의 은혜가 함께 하셨음을. 오직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