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직분이 있으므로 성전 주위에서 밤을 지내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더라
대상 9:27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시편 89:21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84:10).” 문득 시편의 이 말씀이 떠오른다. 이처럼 내가 교회를 지키고 아침이면 문을 열었다가 저녁이면 문을 닫는 일에 대하여 감사한다. 아주 단순하여서 나의 사고란 사사롭다. 같은 복도를 쓰는 어느 교회는 주일 예배 때만 사용되고 거의 매일 비어있다.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면 하나님 앞에 투정부리듯 내게 달라고 시샘을 한다. 우리는 한 달에 60여만 원의 월세를 낸다. 그럼 하루에 2만원씩, 내가 그 자리를 지키면서 드는 생각이다. 가령 낚시를 다녀본 사람들은 알지만, 요즘은 관리형 저수지마다 입어료를 받는다. 도시 근처는 대부분 3만원으로 올랐다. 고기를 잡든 못 잡든, 12시간 중에 몇 시간을 하든 말든, 자릿세를 무는 것이 아까워서도 나는 시간을 다 채우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직분이 있으므로 성전 주위에서 밤을 지내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더라(대상 9:27).” 하는 말씀이 귀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이를 히브리어 본뜻으로 밝혀 ‘하나님의 전의 문지기’를 ‘하나님의 전에 우두머리’라 한다는데 그것도 역설적인 의미에서 나는 만족스럽다. 어딜 가나 교회를 지키는 사람으로서 세 들어 있는 주제에 나는 주인처럼 군다. 누가 점검을 오고 무슨 홍보를 나오면 내가 응대한다. 우체부 직원도 다른 사무실 등기우편을 들고 오면 나에게로 온다. 즉 나는 이처럼 내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순종할 따름이다. 순종이란 내 생각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이러고 있으면 뭐하나? 이러려고 목사가 되었나? 하고 여겼던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 다음 순종의 특징은 하나님이 맡기신 것으로 족한 것이다. 다시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맡기신 이의 뜻을 받드는 일이다. 그러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이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시 89:21).” 나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낚시를 갈 생각이었다. 전에부터 친구가 그리하였으면 하고 얼추 그리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려면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 다음 날이 주일이라 은근히 부담스럽기도 하였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하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잖아도 내가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나도 토요일에 안 돼. 아내와 성경공부를 가야 하거든! 오호, 나는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참으로 희한하였다. 그래서 따로 약속을 잡은 것이 마지막 날 오후에 저수지가 아닌 우리 교회로 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오후에 오는 ‘알바소녀’에게 그 날은 못 할 것 같다고 하니,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서운해 하여 다른 날을 30분씩 더 하기로 하였다. 하나님의 전에 문지기로 있다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께서 이루시는 일의 지킴이가 된다. 나더러 자꾸 고맙다고 하는데 나는 저 친구를 위해 한 것이 없다. 또 이 아이의 마음을 주께서 열어주시는 것이어서, 순종의 특징은 세 번째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맡기신 그 일을 언제든 할 수 있는 준비다. 그렇듯 두렵고 조심스럽지만 나는 아이에게 나의 메모지를 건넨다. 읽은 책의 내용이나 그때마다 적은 조각글들이 무질서하게 기록되어 있는 종이다. 아이는 난독증처럼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수동적으로 문서작성을 한다. 것도 의미가 있겠다싶은 것은 내가 본 것을 아이가 읽었으면 하는 것이다. 또한 나의 허접한 소설을 인칭을 바꿔 일기글로 옮겨 적는 일을 시키는 것은 글을 안 써본 아이에게 그나마 문장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물론 우리 모두의 이야기 가운데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이 한 문장 안에 남의 이야기이면서 내 이야기가 동시에 담겨 있다. 나의 마음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나 그러한 나의 허접함까지도 주께서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믿는다. 결국 바울의 증거처럼 믿음으로 좇아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친구의 놀라운 변화는 물론 나에게 두시는 이러한 마음으로도 나는 증거가 된다. 가끔은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서 혼자 들어앉아 문지기로 있는 자체로 얼마나 답답증을 느끼고는 하는지! 그러면서도 나는 유치하게 생각하기를 그 자체로 최소한 하루 2만원을 버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고는 한다. 어차피 비워둬도 2만원이 나가는 공간을 하루 꽉 채워 지키는 것만으로도 그 값을 하는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종종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갈릴리 바다는 해상보다 낮은 수면이라 기상예측이 어려웠다고 한다. 다들 어부들로 기후에 따른 바다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텐데, 저들은 풍랑이 일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두려워하다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웠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물살의 주인이시고 바람의 출처이시며 풍랑을 다스리시는 이가 함께 하시는데 두려워들 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저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늘 염려라는 풍랑에서 염려에 밀려 떠밀리다 기진하여 간다. 그럴 때 이 본문의 말씀이 일깨우시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눅 8:25).”
믿음이 있다고들 하나 거짓 믿음이 태반이고 나머지도 연약한 믿음들뿐이다. 거짓 믿음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고 먹을 것을 나눠주실 때는 사람들이 늘 저를 믿으며 따랐다.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면서 믿는 사람들처럼 그 환호와 열광이 대단했다. 그런데 성경은 저들이 믿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예수를 증오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다. 돌을 던지고 침을 뱉는다. 경우에 따라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마음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거짓 믿음의 특징은 말씀을 배우려하지 않고 정직히 행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한다. 희석하고 때론 와해한다. ‘현대인’을 운운하며 현대에 맞게 성경도 바꾸고, 그 일에 평생을 걸기도 한다.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 별의 별 성경을 다 만들어내고도 모자라 이를 희극적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이를 자신의 믿음의 과업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이다.
거짓 믿음처럼 연약한 믿음은 속으로 믿고 겉으로는 티를 못 낸다. 가령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 같은 사람이겠다. 저들은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요 12:42).” 그러니 드러내놓고 자신의 믿음을 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 그런데 성경은 저들을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고 믿음이 약하다고 하셨다. 신앙을 당당히 고백하지 못하고, 가진 것을 잃을 것 같아 두려워하고,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귀히 여긴다. 그리니 오늘에 있어 나는 ‘문지기’로 교회를 지키듯 아침에 일찍 문을 열고 종일 혼자서도 ‘여기에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사역인가? 이를 맡기신 이에 대한 충성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나는 은연중에 또는 의도적으로 아이 앞에서 나의 하나님을 자랑한다. 말을 하다 문득 또는 반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말해준다. 아이는 아직 자기 이야기를 할 준비가 안 돼 있다. 하고 싶을 때 해! 하고 나는 아이를 채근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제는 불쑥, ‘글로 쓰고 싶어진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하는 것이다. 그 말이 내게는 ‘하나님께 들려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는 소리로 들렸다. ‘물에 젖은 성냥은 쓸모가 없다.’ 정작 필요할 때는 그어지지 않는다. 불꽃이 일지 않는 것이다. 쓰고 싶을 때 써. 그게 뭐든 써. 조각글이면 어때? 나는 아이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러나 속으로는 환호하면서 말해주었다. 우리의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소용없다. 정작 염려의 수렁에 갇혀 어둠 속에서 불을 피울 수 없는 젖은 성냥이면 어디에 쓰겠나?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주님의 물음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저들은 신앙 고백도 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한다고 했다. 이는 심리적으로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저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다급히 예수를 찾는 믿음이 있었다. “주여,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렇듯 급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을 믿음으로 아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그때는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다. 타종교를 믿는 이들도 혼신을 다해 부르짖는다! 나는 아이가 옮겨 적어준 것에 대해 그 자체로 훌륭할 뿐 다른 것은 일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이 모든 일에 주의 손이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시 89: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