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이와 같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 온 집안이 함께 죽으니라
대상 10: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시편 90:6
‘죽음에 대한 가이드’를 선생이 보냈다. 저의 출판사에서 엮은 것인데 여럿의 신비주의자들이 죽음을 체험하고 사후생에 대해 논한 것을 정리해둔 거였다.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다음에는 조금 답답하였다. 들으라는 말씀에는 귀를 닫고 이런 감언이설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그렇게 선생과는 이야기가 어렵고 마음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모두는 죽는다. 사울 일가의 죽음은 처참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 온 집안이 함께 죽으니라(대상 10:6).” 우리 인생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6).” 저들 연구가들 가운데는 의외로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마침 낮에 읽은 사도행전 7장 스데반 집사의 설교 한 대목이 뇌리에 남는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
저이는 내가 돌이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될 때도 그처럼 반대하였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보내온 서너 권의 책을 뜯어보고는 난감하였다. 기도만이 살 길이란 생각도 들었다. 저를 위한 기도가 더욱 필요하였다. “내가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 11:23).” 성경으로 답하고 성경으로 물어야 한다. 기준이 흩어지면 모든 게 뒤섞여 뒤죽박죽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저들의 말에 호기심이 생겨 책을 훑어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안의 불편함은 더해졌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기이한 것은 이 엄연한 말씀을 왜 저이는 듣지 못하는 것일까? 여전히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흔들리시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모르겠다, 나는. ‘알바소녀’에게 맡기는 일 가운데 하나가 나의 메모라. 나는 이제 메모하는 것조차 정서를 하고 또박또박 적어 아이가 알아볼 수 있게 한다. 나는 은연중에 아이가 옮겨 적은 말씀으로도,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을 믿는다. 나에게 두신 일이고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대상이다. 선생을 어찌 대해야하는지는 굳이 내 일이 아니다. 맡기실 것이면 주께서 다루시고 흔들어 깨우신 뒤의 일일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을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문자라도 해야 하나하다 그만두었다. 버젓이 성경이 있는데 다들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려 한낱 꿈같은 이야기를 책으로 묶고 그것을 팔아 이문을 남기려고 하다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 23:36).”
오늘 사울 일가의 죽음은 새삼 그 값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저희의 죄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613개의 율법 가운데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첫째 계명으로 두시고 둘째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나는 아이에게 이것을 손으로 적어 워드로 다시 받아 적게 하였다. 읽고 쓰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성경을 가까이 하게 해야 한다. 주께서 지혜를 주신 게 놀라웠다. 나의 허접했던 평소의 메모들이 이처럼 요긴하게 사용될 줄이야! 어느 신비주의자와 저를 신봉하는 자들의 평생에 이룬 과업보다 이와 같은 말씀 한 구절이 아이에게 더 유용할 것을 믿는다.
저녁에 누가 아이들을 데리고 들렀고 같이 식사를 하고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를 전도하였던 그의 딸아이가 오늘에서야 주의 강권하심에 붙들렸고 이는 그 부모를 돌이키려하심에 대해 생각을 같이 했다. 저로서도 감회가 새로운 것이다. 어쩌다 자신만 남고 그 또래들은 모두 하나님 없이 사는 삶으로 빠져든 것일까? 달리 방법은 없다. 주의 빛이 비취어야 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아무리 학자나 그 어떤 교수가 요동을 하고 죽음을 연구하고 그따위 가이드를 편집하여 배포한다 해도, 나는 선생이 그와 같은 혼란에 일조를 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자신만으로 아니고 곁의 영혼을 영원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우리 안의 성령이 이를 불편하게 하고 저를 위해 마음에 담게 하신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뭐라 한들, 저는 선생이라. 나름은 확신을 갖고 사는 일이어서 그것이 꺾이지 않는 이상 이처럼 적그리스도와 같은 일을 멈출 리 없다. 하필 그가 저이여서 나는 속상하였다. 마음이 아팠다. 나름은 날 위해 그런 책을 보낸 것이겠으나, 저녁에 온 누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목사를 뭐로 보고!’ 하며 우스갯소리 아닌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접근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고,
우리 눈에 감춰져 계시며
지극히 복되시고 지극히 영화로우시고
옛적부터 계시오니
전능하시고 승리하시는
주의 이름을 저희가 찬양하나이다.
-윌리엄 차머스 스미스 (William Chalmas Smith)
어쩌면 갈 길이 서로 다른 것이다. 이제는 서로의 사고와 세계가 다른 것이다. 마음은 어려웠지만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럼에도 부디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저와 함께 하시기를. 돌이켜 다 늦었다 싶을 때 친구를 교회로 이끄시고 말씀 앞으로 오게 하신 이가 평생을 선생질에 한눈팔고 있는 이에게도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결코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 세상의 학식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어쩌겠나? 나는 묵묵히 저의 어처구니없는 짓에도 가슴 졸이며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랄밖에. 부디 저의 미련함이 깨어지기를. 나는 오전에 오는 아이와 멀리까지 산보를 다녀오고 같이 장난을 떨면서 감사하였다. 비록 정신지체장애 3급으로 생각은 열 살, 지능은 60밖에 안 된다지만 아이는 늘 주를 갈망하는 자로서 내 곁에 보내셨다. 내가 저를 건사하는 일 같은데 저가 늘 내게 의지가 된다.
오후에 오는 ‘알바소녀’를 두고도 기도하게 하신다. 보내신 이가 또한 다루시고 이루어갈 놀라운 세계를 기대하며, 나는 다만 나의 이 연약하고 부족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이 세상 그 어떤 지식으로도 알 수 없으신 분의 손길을 바라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욥 11:17).” 그 부모의 무지함으로 아이들이 건너고 있는 세월이 딱하였다. 우리가 어찌 측량할 수 있으랴!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9:10).” 어찌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11:7).” 그러므로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시 71:15).” 우리 안에는 누구나에게나 주를 알만한 것이 있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나는 속상하였고 또 감사하였다. 결코 나는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손 안에 있다.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욥 21:19).” 주는 나를 돌아보시고 속량하신다. 찬송하자(눅 1:68). 이로써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그러므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이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90:1-2).” 나는 오늘 시인의 노래를 사랑한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4).” 이와 같은 허망함 앞에서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6).” 그러므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이를 죽음으로 연구하고 사후생을 넘겨다보고 만족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11).” 다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 나는 기도한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