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대상 11:9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편 91:14-15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점점 더 강성하여 간다. 주를 바라며 주를 사모한다는 게 무엇인지, 한 영혼이 바라고 의지하고 구하며 날로 변하여 가는 모습을 나는 토요일에 오는 친구에게서 배운다. 저의 처지가 저로 더욱 간절하게 한다. 저는 연보와 말씀 묵상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리스도인으로서 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 11:23).” 말씀으로 말씀 가운데서 ‘내가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하는 심정으로 가르치고 설명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곧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 그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그렇게 우리는 서너 시간을 뚝딱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했고 이를 일상에서 우리 삶으로 드려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부디 저의 그러한 간절함이 지속되기를. 그래서 오늘 다윗을 향한 말씀처럼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점점 더 강성하여 가기를. 이를 위해서는 오늘 다윗의 모습처럼 주를 먼저 바라고 섬기는 마음이 중요하였다.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그리워하며 마시고 싶어 하였다. 이때는 전쟁 중이라. 세 사람이 가서 그 물을 길어오자 다윗은 오히려 이 귀한 물을 여호와께 드리었다. “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고(대상 11:18).” 곧 토요일에 오는 친구는 자신의 수입이나 일에서 또는 사람과의 사이와 그 교회에서의 일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하기를 원했다.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것인데 먼저 주께 부어드리고자 하는 마음이어서 나는 놀라웠다.
저의 안에 사모함이 저로 하여금 주 앞에 더욱 나아가기를 갈망하게 하는구나! 그러할 때, 주께서 함께 하시니 그 영혼이 강성하여 간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전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4-15).” 비록 이 땅에서는 사람들의 눈총과 멸시와 천대를 받는 초라한 삶이었으나 저는 그 삶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묻고 답하는 형식의 성경공부에서 저는 주께 하여 ‘아멘’함으로 영광을 돌리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저로 인하여 내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 안에 이는 여러 불안과 그 요소에 대하여는 나야말로 병적이지만 이를 극복하는 데는 예수님의 자세가 필요하였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어느 사람이 불안을 떨치고 살 수 있겠나? 그러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 아빠 아빠하고 부르는, 전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께 마음을 기울이신 것이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그런 가운데 온전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전제로 하신다. 곧 친구는 그렇듯 말씀 앞으로 나왔고 나는 저를 위하여 말씀으로 다가갔다. 이를 위하여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게 필수다. 그러할 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또한 예수님은 그 평안을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이루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순종이란 내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버리는 일이고 다시 새기는 일로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저의 간절함은 그러한 것이었고, 이번에 처음에로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다며 기뻐하였다. 이는 아무도 모르는 일로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다. 이에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는 저에게 그러한 심정으로 잘했다며 응원하였다. 순종이란 이처럼 기쁨을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미국의 가장 위대했던 링컨 대통령의 일화가 기억난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 해방을 기치로 싸우던 저의 북군이 밀리고 있었다. 그럴 때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이 우리 편에 함께 하십니다.” 하고 링컨에게 말하자, “그건 당연한 일이고,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고 되물었다고 한다.
결국 주님의 평안은 기도에 있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5-6).” 나는 저에게 이런저런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도 말씀 앞에 더욱 나아가야 했다. 누구는 자기네 목사님이 목수처럼 교회 집기를 손수 만들고 교회 앞 채마밭을 농부처럼 가꾼다고 늘 자랑하였다. 그 모습이 곧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토요일에 오는 저 친구를 위해서도 부지런히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또는 아이의 마음에 주의 사랑이 비춰지길 위해서도 더욱 열심히 말씀을 메모하고 적어두어야 한다. 이를 옮겨 적으며 아이는 ‘알바’를 한다. 이를 전해 들으며 친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우리의 평안은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며 세상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곧 죽음을 앞두고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었다. 우리의 불안은 수시로 아무 때나 어김없이 달려든다. 일시적으로 그저 왔다 가는 게 아니었다. 수시로 아무 때나 어이없이 몰아치는 불안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인 것이다. 그러는 내가 저에게 또는 아이에게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말씀뿐이었다.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아빠 아빠하고 하나님 아버지만을 부르고 찾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토요일, 그 꿀 같은 휴일에 막히는 길을 운전하고 인천까지 오는 저의 갈급함에 대하여도, ‘아멘’ 하여 하나님께 양광을 돌리게 되었으면 좋겠다. 성경을 증거할 뿐 세상적인 이치나 현세의 관심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2-3).” 바울과 같이 나의 입에서는 온전히 예수만을 증거할 수 있기를. 내가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기를.
행여 우리의 가르침과 배움이 단지 율법적인 데 빠져드는 것이 아니기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나는 저가 돌아가고, 행여 우리의 말 가운데 진리 아닌 것은 거르시고 오직 우리들로 하여금 진리 가운데서 자유하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항상 나에게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그리하여 그의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7).” 하시는 말씀만을 붙들고 선다. 내가 뭐라고 저에게 이를까? 누굴 가르칠까? 무엇을 본으로 보일 것인가?
말씀뿐이다. 기도뿐이다. 순종할 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아빠 아빠하고 하나님 아버지한테 이 모든 일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곧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대로 읊조리면,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91:2-3).” 이처럼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 곧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14).” 그러므로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