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전봉석 2019. 11. 3. 07:08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대상 18:13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편 98:9

 

 

어디로 가든지 주께서 이기게 하신다는 말씀에서 오래 머문다. 끝없는 고난 같으나 승리의 개가를 부를 날이 올 것이다.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바라는 까닭은 주의 공평하심과 판단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9:16).” 주와 함께 사는 일은 얼마의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일이다. 훗날에 바울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고후 11:11).” 우리 안에 두신 사랑으로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때로 괴로운 일이다.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21).” 안타까움을 또는 속상함을 능가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단지 측은지심으로 하는 게 아닐 거였다.

 

아이는 주일에 오기 전에 글방에부터 글을 올렸다. 밤늦게 카페에 올린 세 편의 글을 보고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교차했다. 토요일에 성경공부로 오는 친구는 포도를 사서 들고 오다 넘어져 뭉갰다. 왜 이런 걸 사들고 다니느냐며 저를 타박을 하다 안쓰러웠다. 괜찮다, 고맙다, 하고 받아들고는 공연히 뭐라 하는데 어느새 초파리가 날아들었다. 스물세 살 아이는 저쪽 교회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곧 엄마와 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 하며 카톡을 하였다.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내 주제에 이들을 어쩌면 좋을지. ‘사람의 뜻에 따라서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훌륭하고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12).”

 

손목이 시큰거려도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어찌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저의 주체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가늠하고, 스물세 살 한참 왕성할 나이의 청년을 다룰 수 있을까? 내가 받은 것은 배운 것도 아니고 자원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주의 강권하심으로 이뤄지는 일이었다. 이를 마음으로 안다. 내 지식으로가 아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빛이 되시고 그 빛을 비추시는 이가 내 속에도 비추이셨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2:8-10).” 이는 그가 하시는 일이다.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려 하심이다. 점심을 대접하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돌아가는 친구에게 퉁명스럽게 말하였으나, 우리는 이 영광을 고대한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8:21).” 곧 오늘 우리의 고난이 허튼 것 같으나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 고약한 사슬은 하나님이 감으신 게 아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다. 자기아집이 자기를 숭상하는 굴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 생겨난 일이다. 기어이 고통을 호소하며 공평한 심판을 바라게 되는 것은 이 땅의 그 무엇도 우리를 풀어줄 수 없고 놓여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나는 저들에게 말씀으로밖에 다가갈 수 없다. 측은지심으로는 내가 지레 죽을 지경이다.

 

우리의 아둔함에 대하여, 말씀 앞에서도 말씀을 거역하는 삶이었으니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13).” 우리 안에 내재된 죄성을 난들 무슨 수로 뿌리 뽑을 수 있을까? 결국 부활이 없이는 죽음의 구원도 헛되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15-16).” 그러므로 우리는 죽고 우리는 살아나야 한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학수고대하는 바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8:19-20).”

 

나는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데 서러워, 안타까워서 자꾸 말씀으로만 붙들리려 한다. 나의 감정이란 고작 그 정도여서 저들을 불쌍히 여긴다 하여 무얼 할 수 있겠나? 말씀밖에는 답이 없다. 기준이 엄연하여야 싫든 좋든 우리는 좌로도 우로도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 시대처럼 진영논리에 빠져 억지에 억지를 더하는 사회에서 나는 무엇으로 푯대를 삼을 것인가? 내게 보내시는 한 영혼을 건사하는 일이란 단순하게 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 전부가 아닐 거였다. 나는 저에게 말하길, 인천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기를 바란다. 그 영혼의 갈급함이 섬기는 교회에서 주가 돌보시는 성도들 가운데서 위로함을 받고 주께 붙들려 살 수 있다면! 내가 뭐라고 저 아이가 밤늦은 시간에 몇 편의 글을 카페에 올리고 있을까? 또는 일일이 문자로 알리며 자신의 동선을 묻는 아이에게 나는 무엇으로 답해야 옳은 것일까?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5).” 저마다의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끝없는 고난을 겪고 사는 것 같지만 공의와 성실로 띠를 삼아야 한다. 몸을 묶고 허리를 동여야 한다. 자칫 여기다 저기다 기웃거리는 인파에 밀려 광화문이고 서초동이고 어디로 쓸려 갈지 알 수 없다. 자신의 가난과 장애와 외로움으로 다들 지금은 힘에 겨워하지만 그때에는 다를 것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6-8).” 그 평화는 우리에게 약속된 거룩한 산에서의 일이다.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는 비로소 충만하여질 것이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9).”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말씀으로 기도로 찬송으로 같이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그러는 동안 전쟁과 전쟁은 끝이 없고 난리와 난리는 쉬지 않지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나는 아이의 외로움과 답답함을 주께 아뢴다. 저의 어쩔 수 없음을 주께 고한다. 힘에 부쳐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도 빠듯한 사람인데, 주가 더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평안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주일 날 아침,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하는 말씀을 붙든다. 고로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하는 시인의 고백이 내 것이다. 우리의 것이다. 그러므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98:1).” 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요 자기를 위하여도 기필코 이루실 것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2).”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에서 안도한다. 나를 위해서는, 나 같은 게 뭐라고 그리 행하실까?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반드시 자기 이름을 위하여그리 행하실 것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그러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그러므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98: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