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전봉석 2019. 11. 5. 06:45

 

 

해가 바뀌어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요압이 그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서 암몬 자손의 땅을 격파하고 들어가 랍바를 에워싸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니 요압이 랍바를 쳐서 함락시키매

대상 20:1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편 100:3

    

 

앞서 암몬의 랍바성을 치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일이 어떠한가를 읽을 수 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00:3).” 주가 돌보시고 지키신다. 아이가 주일에 빠져서 마음이 그랬는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월요일에 들렀다. 같이 점심을 먹고 주일 날 설교원고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와 같은 마음이 귀하고 소중하였다. 덕분에 두 시에 오는 아이와도 자연스럽게 만났다. 이 모두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안다. 성경에서도 안다본다의 의미는 같은 맥락의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볼 것인가? 아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사는가? 아이의 걸음이 어떻게 이리로 향하였는가? 늘 생각하고 구하고 바라는 데로 발걸음은 간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한 것이다. 가득한 생각으로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기운다. 우리 눈은 봄으로 복되고 우리 귀는 들음으로 귀하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3:16).” 게임에 빠져 새벽까지 잠을 설치다 정오에 일어나 밥도 못 먹고 오는 아이처럼, 돈에 빠져, 출세와 성공에 빠져, 사랑에 빠져 우리는 그저 그것을 보고 그것만을 듣는다. 마음의 청결함은 하나님으로 가득해지는 앎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9).”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로 보게 하시는 이의 은혜다. 우리에게 들리는 것은 우리로 듣게 하신 이의 은총이다.

 

우리도 어떻게 주를 아는지 알 수 없다. 왜 우리로 믿게 하셨는지 그 믿음을 설명할 길 없다. 앎으로 마음이 가득하여 주를 본다. 청결한 마음이란 하루에 25천 번 눈을 깜빡거리며 눈동자를 눈물로 적시고 씻어내는 눈꺼풀과 같다. 아무리 잘 알고도 더러우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 마음을 갈리어 이중적인 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볼 수 없고 따를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결국은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간다. 생각이 머무는 곳을 보고 산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어쩌겠나? 이는 당연한 이치다. 그러므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23).”

 

나는 아이가 와서 마음이 즐거웠다. 같이 말씀을 나누고 남아서 아이가 공부하다 갔다. 덕분에 알바소녀와 시간이 겹쳐 둘이 탁구도 쳤다. 그렇게 얼굴을 익히고 마음을 익히다보면 언제쯤 주일에도 아이가 일어나 예배에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함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4:8).”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수시로 눈을 깜빡거림으로 밝은 눈을 가지는 일처럼 그 마음이 청결하여져 하나님을 보는 일이다. 더 알고 더 가까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였다. 아이가 돌아가며 그 아이로 주일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 나의 마음과 같았다. 우리의 기도제목이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안다. 앎으로 보고 봄으로 가까이 한다.

 

부모님이 같이 관상동맥 조영술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였고 어머니는 두 번에 걸쳐 시술을 받아야 했다. 마음이 초조하여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며칠 더 병원에 계셔야 하는데, 가보고 싶은 마음으로만 무거웠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는 녹초가 되어 소파에 누웠다. 아는 일보다 실질적인 게 또 있을까? 보는 것으로 알고 아는 것으로 보는 세상이 얼마나 구체적인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을 묵상하였다. 우리가 하기 나름이 아니다. 마음의 청결은 내가 주도할 수 있지 않다.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이룬 게 아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5-8).”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내가 이룬 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일하셨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우리의 그릇됨을 전가하셨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이를 위해 자기를 드리셨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7:27).” 이 모두는 우리의 죄를 없이하시려는 일이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6).”

 

이를 안다는 일이 얼마나 귀한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을 보고 자기의 이상과 목표를 우선하여 본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우리의 의로 우리가 의롭다 하신 게 아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신의 의다. 우리에게 전가된 의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우리의 행위에 앞서는 의다. 우리의 죄는 주께 전가되었고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이는 은혜이지 내 나름의 선택이나 의지나 수고에 의한 게 아니다. 이를 알든 모르든 하루에 수만 번을 눈꺼풀이 깜빡거리듯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의다.

 

은혜로 대해 주시는 의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5:17).” 곧 값없이 주신 선물이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우리는 영원히 안전하게 되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이는 미리 정하신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이와 같이 말씀을 따라 마음을 정돈하는 일이 청결이다. 한 번에 깨끗해지는 마음도 없고 설령 그러해도 다시는 더러워지지 않는 마음도 없다. 쉴 새 없이 더럽다. 무의식적으로 나의 눈꺼풀은 깜빡거리듯이 우리 안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우리로 정하게 하신다.

 

아무도 의로울 수 없었다. 그러니 지혜자는 말하길,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3).” 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 모두를 조성하시는 이가 계시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45:7).” 이를 알면 우리는 주를 더욱 본다.’ 우리 곁에 죄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5:4).” 나는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서 또는 부모를 생각하며 졸였던 마음으로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우리의 푯대를 삼고 좌표로 삼자고 아이에게 가르쳤다. 삶에 기준을 잃으면 갈팡질팡하게 돼 있다. 이에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100:1).” 우리 안에는 우리도 알 수 없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2).”

 

어찌 나 같은 자에게 이러한 큰 은혜를 주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 나는 봄으로 알고 앎으로 본다. 그리할 수 있게 하심이 귀하였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