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권능의 날에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
대하 1:10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이런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전혀 앞뒤 맥락에 닿지 않은 말로 그 의식은 널뛴다. 이를 바로 잡으려니까 하나마나한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자신의 성향으로 치부하며, 어쩌라고? 하는 무기력에 사로잡힌 아이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힌다. 징징거리듯 치대며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고민 또 하는 이제 중년의 누구는 또 어쩌면 좋을까? 어디서 무슨 젓갈을 주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기분이 상하기도 하였다. 뭐라 한들! 씨름하듯 가르치다 내 속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아, 아픈 아이지! 상한 심령이었어!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나는 이 아침 솔로몬의 기도를 따라한다.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대하 1:10).” 내가 무슨 수로 저를 대할 수 있겠나?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 오후에 오는 아이도 돌아가고 깜빡 졸았다. 누가 들어와서 놀라 일어났더니 고1 아이가 오는 날이었다. 어떤 성가시고 불편한 마음이 먼저 일었다. 다 늦게 마흔네 살의 친구가 토요일에 회사에서 특근을 안 한다고 하며 연락을 했다. 그래서 이번 주에 못 온다고 하였는데 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나는 쉬고 싶어서 내가 안 된다고 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오후에 온 아이의 원고를 읽고 같이 뭐라 얘기를 나눈 뒤 잠언을 피고 같이 한 장을 읽었다. 싫은 내색이 역력하였으나 나를 위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였다. 주의 사랑이 아니라면 내가 대체 너의 마음이나 그 상태에 대해 관심을 둔들 뭘 할 수 있겠니?
주의 권능으로 아이들이나 누가 오는 것이라면 주의 권능을 주셔야 나 또한 이를 감당할 수 있을 거였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신 3:24).”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보면 지친다. 내년에는 너도 수능보자? 검정고시부터 얼른 보고 내친김에 그리 달려보자? 하며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데 그저 시큰둥할 따름이다. 웃자고 하는 소리로나 듣는 듯하여 나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새벽 4시까지 잠이 안 온다고 토로하는데, 낮에 그렇게 자니까 잠이 안 오는 것을! 그래놓고는 자신은 열두 시간 이상을 자야 하는 사람이라는 소릴 태연하게 해대는 아이에게 나는 대체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내 속이 시끄러워서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성경은 나에게 이르신다. 장성한 사람이 되라!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내가 자라야 나에게 총명을 주실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그러므로 나는 이제 판단해야 한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전 10:15).” 주가 내게 총명을 주시고 지혜로 자라게 하셔야 할 일이다. 성경은 그러기 위해 유순하게 처신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7-8).”
그러니 내가 무슨 수로 이를 이겨낼 수 있을까? 주 안에 서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이는 또한 예수님의 심정으로 해야 하는 일일 텐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8).” 낮에 찾아보고 읽었던 내용들이 모두 아우성치듯 나를 격려하시는 말씀뿐이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1-13).” 나는 한참 아이들과 또는 누구와 입씨름하듯 말에 말을 이어가다 그만두었다. 아, 아픈 아이였다! 상한심령들이었다! 미안해, 하고 오전에 오는 아이에게 같이 점심을 먹으러가며 사과하였다. 뭐라 나무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아이의 엉뚱한 대답에 짜증이 났다.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어쩌면 내가 뭐나 된 듯 저들을 훈계하고 교훈하고 이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닌 척 해도 내 안에 어떤 이기심이 있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어쩌면 나는 내가 섬기는 일에 대해 앞서서 어떤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누가 듣고 저들로부터 뭐라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섣불리 우쭐했던 것이다. 은근히 누구의 칭찬과 관심을 원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말씀으로 기도로 한다면서도 내 방식을 선호하였다. 그러다 제대로들 따라오지 않으면 나는 얼마든지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솔직히 어제는 여기저기가 아팠고, 나는 자꾸 눕고만 싶었고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럼에서 다섯 시를 넘겨온 아이와 앉아 잠언을 같이 읽고 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것에 대하며 설명하면서, 아뿔싸! 나는 그것이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보자,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길거리는 아무나 드나드는 길이다. 그 마음을 내버려둠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이 마구 밟고 다닌다.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광장은 다양한 사람들의 온갖 지껄임과 주장이 난무한 땅이다. 그것은 모여 힘을 더하고 문화를 이룬다.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늘 분주하고 부산하기만 한 것이 길목이다. 속이 시끄러운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성문 어귀는 나름의 가치와 이상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 통로다. 자기주장과 신념이 성문 어귀다. 성중은 비로소 안주하고 스스로 옳다 여기는 타성이다. 아이의 표현처럼 스스로 일컫는 성향이다. 그래서 지혜는 소리치고 부르고 나를 붙들어 세우고 말한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는 이 대목을 아이에게 설명하다 내게 전하시는 말씀으로 들었다(잠 1:20-22).
마지못해 눈을 뜨고 있는데도 나는 기도하였다. 아멘, 하지 않는 아이를 대신하여서도 두 번 세 번 아멘 하였다. 싫든 좋든 해라, 억지로라도 해라, 네 몸을 쳐서 복종시켜라!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며 말했다. 주일에 예배에 나오지 않고, 함께 말씀으로 기도로 시작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감당할 수 없다! 내가 그 정도로 잘난 위인이 못된다! 아이가 돌아가고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본래 은밀하게 숨어있는 이기심은 네 가지 특징을 가졌는데, 하나는 분노다. 내 뜻에 반대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더 자야하고 놀아야 하고 응석받이로 굴고만 싶은 아이에게 너는 한 달 뒷면 스무 살이다! 하고 일침을 놓았다. 또한 이기심은 자기연민을 동반한다. 동정받기를 원하는 숨은 마음이다. 싫다고 하면서도 누군가 불쌍히 여겨주고 자신만 위해주길 원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이기심은 성급한 비난을 일삼는다. 모두가 남 탓이다.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을 두둔하려고 한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늪은 음울함이다. 스스로 그 안에 안주하기 위해 낙담하고, 침울해하고, 무기력해하며, 무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나 또한 여전한 반응이다. 그것으로 진리를 거절한다. 그리 가고 싶지 않은,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4).”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태도는 어떨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이 얼마나 난센스 같은 진리인가?
성경은 이제 더욱 단호하시다. 안 되면 네 눈을 빼버려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문맥 그대로 보면 참으로 잔인할 따름이다. 나는 죽어도 내 의지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내가 저들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나는 말씀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난감할 따름이다. 그러니 주께 아뢰기를 솔로몬의 기도로 나아간다. 내게 주의 백성을 건사할 수 있는 주의 지혜와 저들을 사랑할 수 있는 주의 마음을 주옵소서.
그러자 오늘 주님이 소리 내어 말씀하신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그때에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