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대하 6:40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시편 115:1
종종 단호할 필요를 느낀다. 의외로 아이들은 영악하기 그지없다. 떠보고, 떼쓰고, 억지부리고, 골지른다. 오후에 오는 아이가 자기 글을 안 썼으면 좋다고 하였다. 그럼 오는 시간을 줄이자고 했다. 나로서는 굳이 시킬 일도 아니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가며 해야 할 일들도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런 뒤 아이의 의견을 물었다.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부담 없이 써도 된다면 자기 글쓰기를 계속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들을 가리키며 몇 번 읽고 밑줄 그은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을 옮겨 쓰라고 일렀다. 그 가운데 먼저 집어든 것이 <구속의 심리학>이었다.
종종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 허무하기만 하다.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다. 오전에 오는 아이야 그렇다 쳐도 저녁에 오는 아이도 가관이라. 글에 대해서는 그렇다 쳐도 같이 잠언을 한 장씩 읽고 그 가운데 한두 구절을 붙들어서 나누고 기도를 한다. 기도 끝에 아멘, 좀 하라고 일러도 아이는 뚱할 따름이다. 그러다 한다는 소리가 아멘, 할 테니까 5만원을 달란다. 웃자고 한 말 치고는 서늘하였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싶어서… 그러니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할 수도 없어서 나는 그저 주님,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가정예배로 같이 읽은 말씀 중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하시는 말씀이 위로가 되었다. 내 의지로는 아니다. 내가 어찌하여 아이들 중 하나라도 온전히 건사할 수 없다. 기어이 오후에 오는 아이는 수요일에는 쉬고 다른 날에 30분씩 일찍 오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늘 그때까지 자다 오느라 밥도 못 먹고 다니면서 주중에 하루는 밖으로 안 나오고 늘어지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참 생명이 아니고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 그러니 나 혼자 애면글면 속 끓일 일도 아닌데, 자꾸만 속상한 것이다.
죄란 이처럼 하나님과 결코 의도하지 않는 관계로 나아간다. 우리 안에 있는 속성이 그러하고 본성이 그러하다. 나는 아이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저들 안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전제가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의 사고와 능력과 삶이다. 완전히 새 사람으로 사는 일이다. 아이가 옮겨 적은 내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참 생명이 아니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 1:18).” 그리 행함이 우리 의지가 아닌 것이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나는 배운다. 내 속에 있는 감정이란 것은 참으로 취약해서 속으로 생각하는 일을 누가 본다면 나에게는 환멸뿐일 것이다. 어쩜 그리도 떠보고, 떼쓰고, 억지부리고, 골지르길 잘 하는지! 나야말로 영악하기 그지없어 스스로에게 단호해야 할 필요를 자주 느낀다. 성전을 건축하며 오늘 솔로몬은 기도하였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대하 6:40).” 이 곳이 내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글방이었으면 좋겠다. 세우신 우리 교회였으면 좋겠다. 하나님이여,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나는 아이가 돌아가고 한 시간씩 짬이 날 때 의자에 누워 그저 주님을 부른다.
이대로 하고 있으면 되는 건가 싶다가도 이게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하나마나한 소리와 주나마나한 마음씀과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을 것 같은 아이들의 돌 같은 태도에서 나는 좌절을 느끼곤 한다. 저녁이면 기운이 빠져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다. 만사가 귀찮을 정도다. 나야말로 새 생명으로 살아야지 자칫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겠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 내가 바랄 것은 기적뿐이다. 아이가 달라지겠나? 그 부모가 나아지겠나?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꾸역꾸역 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럴 거면 왜 오니?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 115:1).” 시인의 기도 앞에서 나는 먹먹하다. 어쩌면 내 마음에 이는 지금의 이런 심정이 모두 나의 어떤 성과에 미치지 못하는 데 따른 회의가 아니겠나?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5-46).” 주의 영이 내 안에 함께 하시는 증거가 그래도 저 아이들로 인하여 내가 괴로워할 줄 안다는 게 아닐까? 단지 어디 실망뿐이겠나?
‘사람은 자신을 다스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주인 삼아야 한다.’ 아이가 적어둔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에 다시금 공감한다. 신령한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이 아니면 그야말로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아니면 나는 아이들의 영악스러움에 끌려갈 따름이다. 아니, 내 안의 골지르는 감정에 매번 휩쓸릴 따름이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7-8).” 구분이 명확할 필요가 있다. 다를 바 없는 나를 두고 내가 나아질 수 있는 길은 주를 의탁하는 길밖에 없다. 내가 누굴 나무라고 뭐라 하겠나? 나는 어떠했던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나를 마주할 때면 아이들을 오늘 나와 같이 두시는 까닭은 명백해진다. 내가 중생했다는 것은 나의 죄의 성향에 순종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지는 일이고, 죄의 성향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는 일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내가 한 게 아니다.
자주 잊어버려서 마치 나는 처음부터 달랐던 것처럼 위엄을 떤다. 어느 날 나는 죽었다. 더는 나로 살지 못하게 하신 이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여전히 다를 바 없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은 나의 영을 주관하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형상에 의해 땅에 속한 형상이 지워진다. 이는 모두 고통 없이는 어렵다. 내가 볶이고 힘에 겨워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고 혼자서 어디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가도 이것을 인내하라는 것이겠다. 인내함으로 연단이 이루어져 새로운 인격이 생성된다. 이와 같은 인격이 운명이 되는 것이다. 소망을 이루는 줄 앎으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줄 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요즘 자주 묵상하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아니면 내가 어디 맡기신 이 일을 하겠나? 종종 아이들에게 억지로라도 하자. 해라. 하고 종용하는 것도 그런 말이다. 억지로라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오죽하면 날마다 자신은 죽는다고 할까? 고통 없이는 무엇도 태어날 수 없다. 사람은 고통 없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날 수 없다. 누누이 성경은 강조하고 계셨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이번 주일 설교 본문으로 주신 말씀도 그러하였다.
오직 순종에 의해서만이 들어가는 나라,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아니면 대책이 없다. 내가 저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없고 단 하나도 아이의 마음에 믿음을 줄 수 없다. 다만 같이 할 따름이다. 끙끙거리면서도 곁을 물리지 않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는 동안 내가 달라지는 것이다. 실은 내가 자라고 있는 것이고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일이었다. 늘 도달하는 마음이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영역은 성경의 영역이시다.
말씀 중에 거하시고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주의 영역에서 살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아니면 어쩔 것인가?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시 115:9).” 성경은 오늘 아침도 나를 붙드신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0).” 주의 성전, 이 곳에서 나는 기도할 따름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대하 6:40).”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시 115: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