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또 은혜를 베푸소서

전봉석 2019. 11. 28. 06:57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하 14:11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시편 123:3

 

 

다들 사는 게 고단할 따름이다. 믿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이고 저마다 사는 데 따른 바른 삶을 꿈꾸지만 생각만 있지 정작 잘 살지는 못하고 그 의지도 빈약한 것 같다. 아내는 뜬금없이 오빠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떨어져 지내는 처와 막무가내인 두 아들로 인해 위로 받을 데 없는 처지라, 그런저런 사정은 절로 한숨만 나온다. 그런 가운데 우리 안의 노함과 욕과 저주는 가득한데 주님은 이를 살인 죄 이상으로 다루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2).” 그러니 여기에 부합하는 삶이란 게 가능하기나 한가?

 

화만 내도 심판이 있고, 이런 돌 머리야, 해도 공회에 넘겨지고 급기야 미련한 놈이라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던져진다니! 그 자체로 살인이라 하신다. 물론 헬라어로 화를 내다두모스모르게가 있다. 두모스는 낙엽이 타는 정도의 화력이다. , 일어나는 성격이나 기질 같은 정도다. 하지만 모르게는 그 화를 마음에 담고 쌓아가는 것이다. 어떠하든 말 속에 분을 가져도 살인과 다를 게 없다고 하시니, 하나님은 마음을 먼저 달아보시는 것이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16:2).”

 

결코 행동으로 하지 않았다고 괜찮은 게 아닌 것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누가 황폐한 자기 마음을 글로 썼다. 전날에 주정을 하다 잠든 아비가 아침부터 전화를 받지 않아서 놀라 친정으로 달려갔는데 낮부터 막걸리를 한 잔 하고 계신 것이다. 다짜고짜 화를 내고 분을 내고 울어 젖히니 서로가 놀랄밖에. 알고 보니 전날에는 틀니를 뺀 상태로 비몽사몽 잠결이라 횡설수설하였고 낮에 막걸리 한 잔은 반주였던 것인데, 한참 쏟아 붓고 정황을 보니 자기 안에 화가 가득했던 것을 알았다. 그러니 또 늙으신 아비에게 화부터 발산하고는 못내 마음이 아파 울먹거리는 글을 읽고 나 또한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느 통계에 보니 부부 사이에 80% 이상이 화를 쌓아두고 산다고 했다. 대인병질환이라 하여 자주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모든 게 마땅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상은 실제 가까운 사람한테 생기는 것이고 가족 중에 가장 빈번한 마음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분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5:23).” 마음이 분이 있거나 또 누구에게 분을 주었으면 화해 먼저하고 예배드리라는 것이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24).” 그 화를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하신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25).”

 

나는 오후께 누구의 글을 읽고 저의 사연을 내 이야기로 여기고 있을 때 옥한흠 목사의 이와 같은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당부하기를 첫째, 자신의 의를 철저히 배격하라는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한 화해는 어렵다는 소리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철저히 의지하라는 것이다. 내 의, 나의 옷으로는 결단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가 없다. 셋째,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아무도 의로울 수 없음으로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있는 길은 예수 이름으로나아가는 길밖에 없다. 마지막 넷째,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히 의지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성령께서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으로만이 할 수 있다.

 

그렇게 설교 영상을 다 보았을 때 기다렸다 듯 선생의 전화가 왔고 요즘 어떤지, 글은 쓰고 있는지, 자기 생활은 어떤지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말하다보면 저의 일로 저의 삶을 가늠할 수 있다. 무슨 말 끝에 나의 감정이입이나 전이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은사라는 표현에 놀랐다. 물론 불교적인 용어를 들먹이고 다만 사람 사는 이야기로 국한지어 생각하는 정도지만, 시의적절하게도 하나님은 한 편의 설교 영상과 선생과의 통화에서 나야말로 화해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끄셨다. 아침에 무슨 일로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고 화를 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신경질을 부릴 일이 아닌데도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러니 같이 곁에서 늘 지켜보는 딸애가 목사로서의 아빠와 실제의 아빠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래놓고는 또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오전에 오는 아이가 전날에 엄마한테 화를 내고 그 성질에 못 이겨 욕을 하고 먼저 잠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한 누구의 글에서 늙으신 부친의 사건으로 자신도 모르게 화를 쏟아냈던 일을 읽으면서도 그저 시치미 떼고 있던 마음이었는데, 설교 말씀에서 찔렸고 선생의 에둘러 말하는 너스레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아내에게 카톡을 하고 사과를 하였다. 어쩜 이렇게도 번번이 되풀이 되는 염치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종종 보면 스스로 트라우마를 만든다. 만들어서 즐긴다. 그것으로 그래도 되는 것처럼 군다. 정당화시켜서 이를 방어기제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난 그래서 괜찮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믿음이니 신앙이니 이를 너무 추상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이보다 구체적인 일상이 어디 있겠으며, 겨루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이 또 어디 있겠나?

 

가정예배로 읽었던 말씀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하시는 말씀이 콕 짚어 마음에 던져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서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18).” 내가 당장 취해야 할 마음과 자세와 실제의 일상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데 누구의 아픔과 슬픈 말을 듣고 위로를 하겠나?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다. 나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선생님만 준비되면 저는 울 수 있어요! 하는 아이의 당돌한 말을 곱씹어도, 내가 저 아이를 어찌 다룰 수 있겠나? 무얼 듣고 뭐라 말해주어야 할까? 내가 더 흔들리는 가지 같아서 지레 내가 먼저 죽겠다.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일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21).”

 

만물이 다 나의 것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로 산다는 소린데 과연 그러한가?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4:16).” 곧 우리는 저마다 누군가에게 아브라함이어야 한다.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 오늘 내게 두시는 이와 같은 고통은 그저 단순한 삶을 사는 살이가 아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3:6).” 내게 저 아이를 또는 누구의 사연을, 어떤 상황이나 여건을 거듭 두시는 까닭은 내가 그 약속에 참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3:7).” 이는 결국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11:7).” 어제 하루 어머니는 2차 심장 조영시술을 위해 입원하신 날, 그래도 좀 가뵀으면 싶은 마음과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꿀꿀하였다. 공연히 예민하여 아내에게 화딱지를 내고 그게 마음을 짓누르듯 어렵게 한 날, 누구의 글과 설교 영상과 통화가 이어지면서 하나님이 나로 화해하게 하시는 까닭은 내가 힘드니까, 그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어서였다.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종종 우리는 얼마나 자기 판단에 스스로가 시달리며 사는지 모른다. 자기가 옳다 하고 그 옮음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으로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은 지나치게그러지 말라고 하시는 거였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7:16-17).” 자신도 미치지 못할 기준을 세워서 남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비난하려 드는 마음이 얼마나 수시로 들곤 하는지! 이는 모두 눈이 밝아져자기가 하나님인 줄 아는 원죄의 본성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이를 트라우마라 한다면 스스로 둘러싼 치마야말로 얼마나 허접한 위로고 만족이고 자기 위안이겠나? 가린다고 가려질 문제인가? 그래서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금하시는 것이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오히려 참 평안이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131:2).” 오늘 말씀에서도 아사 왕의 기도에서 배운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 14:11).” 우리를 도우소서.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123:3).”

 

그러므로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