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대하 18:13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오직 주만 바라며 산다는 게 참 의연함이면서도 고독한 일인 것 같다. 말이 좋아 사람을 보고 하지 않는다고 하지, 사람으로 일희일비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인 것 같다.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큰 것이라, 아이는 장염에 걸려서 응급실에 가느라 오지 못했고 딸애는 다른 교회로 나갔다. 나도 나지만 다른 두 아이로 마음이 쓰였다. 토요일에 다녀간 친구로 계속 마음이 쓰였고, 날씨는 한껏 흐리고 쌀쌀하여서 덩달아 몸이 아팠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어떻게 구원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위하여 구원을 받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10).”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진단하려하지 않았고 왜 그런가 하고 분석하려 하지 않았다. 슬프면 슬픈대로 마음이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다 의미 없고 소용없을 것 같은 때에 전능자 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는 일이라니! 이는 먼저 내가 짊어지고 살아온 삶에 대한 내려놓음이고 내가 무엇을 짊어지려 하는 헛되고 무의미한 책임감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이가 남아 성경공부를 같이 하면서 나는 나의 심정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말씀으로 위로 받고 말씀으로 일어서는 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면 족하였다.
가령 우리는 같이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였다. 우선 13절까지 예수님 앞에 있는 세 부분의 중심인물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큰 무리’이다. 저들은 표적을 보았고,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이 모두는 놀라운 경험이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를 따랐고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다음은 빌립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먹을 떡을 주라고 하시자 반박에 셈을 하고 그 불가능한 일을 호소한다. 또 하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어린아이다. 그게 나였다면 나는 나의 수고를 내세우며 준비성 없는 많은 사람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일찍 서둘러 준비하였고 그러면서 자신이 먹을 점심을 챙겨왔다는 데 자긍할 것이다. 문득 나는 함께 말씀을 나누며 너는 어느 쪽인가? 하고 물었다. 자신들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예수 앞에 모여드는 큰 무리인가?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빌립인가? 아니면 무모할 따름이지만 고작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놓은 어린아이인가?
그와 같은 물음은 실은 내게 두는 마음이기도 하였다. 오늘 날 우리에게 두시는 이런저런 마음과 상황과 어떤 여건과 환경은 우리가 뉴스를 보고 세상을 접하며 그 가운데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일을 멈추게 한다. 곁에 있는 누구에게서 위로를 얻는 일에 대해서도 그 쓸 데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 12-14).” 성경이 말씀하시는 우리에게 향하신 모든 환경의 목적은 간단하였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15).”
그리하여 말씀에 붙들려 일상의 늪에서 허둥거리지 않게 하시려고, 그러는 데 있어 온전히 주에게서 받은 말씀만으로 살게 하시려고.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대하 18:13).” 4백명의 다른 선지자들은 다른 말을 증언하는 데 있어 오직 주만을 바란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일, 이상의 엄청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아이와 헤어져 일찍 집에 들어와서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누웠다. 누가 마음에 걸리고, 공연히 우울감으로 시달리느라 마음만 어려웠다. 그러고 있을 때 아이의 문자를 받은 것이다. 장염에 걸려서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말에 어떤 서운함이나 체념의 정도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나야말로 옹졸하고 늘 마음을 볶아 스스로 못 살게 구는 타입이라, 주 앞에 부끄러움뿐이다. 언제쯤 과연 의연해질 수는 있는 것일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님은, 오늘 아침도 말씀이 일갈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사모하는 길뿐이다. 아니면 내가 저 아이를 무슨 수로 이해하고 위하고 마음을 더할 수 있을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
그저 나에게는 충성뿐이다. 한 명이면 어떻고 열 명이면 어떨까.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다른 수 있나? 내 형편이면 내 형편에서, 내 처지이면 내 처지에서, 나 하나이면 나 하나로, 내 곁에 두시는 저 아이이면 저 아이로! 오늘 나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으로 내가 남들보다 준비하고 그것에 책임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도 있을 테고,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예수 앞에 내어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빌립처럼 셈을 하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자기주장을 하든가, 그저 표적과 기사를 보고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예수를 따를 수도 있고! 나는 겨우 이런 몸을 가지고, 또는 저런 아이들과 함께, 늘 똑같을 뿐 별로 달라질 게 없는 ‘99세의 아브람’으로 서서 있을 때…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창 17:4).” 주의 언약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을 붙들 수 있겠나?
어디쯤 갔을 때 나는 비로소 자족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을까?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누가 들으면 우습고 어처구니없는 나의 현실에서, 나는 비로소 두 손을 든다. 그리고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이는 전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있었으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이다. 내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저 다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이것이 우선이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해봐야, 아무리 저 아이를 위하고 돌보려고 해봐야, 누구의 아픔과 안쓰러움을 두고 씨름해봐야 다 소용없다. 그럴 수 있을 줄 알고, 될 줄 알았는데 어림없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 하나 온전히 사랑할 수 없고, 저 아이 또는 누구의 아픔도 대신할 수 없다.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오직 말씀뿐이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약 5:17).” 저들은 영웅이 아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성경은 이르시기를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하신다. 아니면 우리도 다를 바 없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환난에 휘둘려 정신 못 차리다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주가 곧 나의 상급이라.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말씀만으로 가자. 나나 너나 누구를 대하는 일이에서든, 다만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주가 이루시는 일이다. 곧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