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전봉석 2019. 12. 20. 07:00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대하 36:23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시편 145:14

 

 

다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지,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답게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 맞는지,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고린도후서 3, 4장을 가정예배에서 같이 읽고 아이와의 일을 이야기하며 주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였다. 이 모든 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이루어지는 일이기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네가 어떠하든 하나님은 누구보다 너를 사랑하신다.’ 나는 아이와의 마지막 시간에 그리 말해주었다. 역시나 나에게는 이별이 힘들다. 고작 두 달 남짓이라 간단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매일 애태우며 속 끓이던 일이라 몇 년의 세월은 흐른 것 같다.

 

자꾸 울 것만 같아서 아이는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나만 이야기하고, ‘알바사이로는 끝을 본 것이다. 주일에 오기를, 언제든 자신의 의지로 올 수 있기를 권하였다. 끝으로 나는 아이와 함께 기도를 하고 마쳤다.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울컥, 하여 어깨를 씰룩거렸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마음이라 나는 그저 안타까움을 그대로 두었다. ‘순종은 내 의지를 돌려드리는 일이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을 회개하였다. 어찌 될 줄 알았던 막연한 기대를 후회하였다. 사람은 결코 사람으로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아이에게 너무 애쓰며 살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 마음의 그림자를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고 알려주었다. 나의 오늘에 대하여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8).” 하고 설명해주었다. 일부러 나만 말하였다.

 

나는 아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렸다. 그것을 글로 표현하라고 일렀다. 표출하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할 때 그 문제는 여전해도 객관화되어 더는 예전처럼 나를 짓누를 수 없다. 하지만 말로 할 때는 표현보다 감정이 표출되어 과장하거나 은폐하거나 그것을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것이어서, 나는 나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썼다. 수없이 쓰고 또 써보았던 나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나를 서럽게 하지 않는다. 꽤 긴 인생이었고 그 날이 험난하였으며 말을 하다 보니 장구하게 여겨졌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이제 그것으로 주께 쓰임받기를 바라는 의에게 종이 되었다.’ 이를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곧 지금 자신 안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는 실제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데 쓰이는 가름막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그 그림자가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6:14).” 돌아보면 그게 나이지만 더는 내가 아닌 나이다. 이를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죽고 싶다느니, 자살을 꿈꾸고 자해를 시도하는 그 모든 게 실은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다그치기도 했다. 그래서 뭐? 불행하니까 뭐? 너보다 못한 이도 얼마나 감사하며 사는지, 사지육신 멀쩡한 게 왜 그러고 있는지, 그래도 된다고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싸고도는 자살충동에 대하여는 어쩌겠나? 죽어야겠으면 죽어야지! 나는 나의 그러저러했던 이야기를 빗대어서 알바와의 마지막 시간을 정리했다. 이것으로 우리 이야기는 끝일지, 아니면 더 이어질 다른 이야기가 있을지, 나는 아이에게 널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겠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결국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아니면 별 수 있겠나? 사는 날까지 살아보는 수밖에! 기어이 갈 데까지 가 봐야 한다면 별 수 없는 노릇이고! 나는 이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것으로 족하였고 감사하였다. 아이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고 나만 말하고 마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들어주려니 그 소리가 다 전날에 내 소리여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나는 다른 길을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누가 어디를 기웃거린다는 데는 아예 관심도 없다. 그래야겠다면 그래야지 별 수 있겠나?

 

그럼에도 어쨌든 아이여서, 그 나이 때 그처럼 무겁고 힘에 겨워 쩔쩔맸던 나의 청춘을 돌아보며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꽃다운 나이냐! 뭘 해도 예쁘고 싱그러울 나이에 왜 그러고 사냐? 내가 아는 정신질환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무기력이다. 성경은 이를 게으름이라 하였고, 상한 심령이라고도 하였다. 저는 늘 핑계가 있다. 길거리에 사자가 있다는 소릴 한다. 저는 늘 괴로울 따름이라, 밥그릇에 손을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 저는 또 늘 자기 생각이 옳다. 지혜로운 자 일곱이 뭐라 해도 자기 생각이 옳은 것이다. 그게 너다! 내가 살아왔던 나의 젊음이었고, 그 아까운 청춘이었다. 나는 기꺼이 나의 치부를 인정하였다. 부디 나처럼 허송세월로 보내지 않기를. 아이를 붙들고 기도하다 한참씩 먹먹하여 울어버리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참았다는 소리를 아이에게도 말해주었다. 왜냐하면 다음에는 우리 같이 주 앞에서 참지 말자? 하고서 말이다.

 

아이가 돌아가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자꾸 눈물이 핑, 돌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또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속상함도 자기혐오도 열등감도 부끄러움도 난데없이 한데 섞여 같이들 꿈틀거렸다. 어쩌겠나? 이 또한 여전히 나인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말씀이 아니면 의지할 데가 없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3-14).” 더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더 고통 가운데 던지신다 해도 하나님밖에 없다. 아이는 이 말을 알아들었을까?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7).”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어서 말이다. 나는 이제 인정한다. 확신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145:14).” 주가 하셨고 하실 것이고 하시고 계신다. 오늘 우리가 나눈 그와 같은 시간들이 결코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닐 것을.

 

별 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영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6).” 주께서는 우리로 자각하게 하신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눈을 마주치면 자꾸 울컥울컥하여 자꾸 시선을 돌려야했다. 말을 하다 말에 안타까워 울먹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말을 자주 멈춰야했다. 애한테 이런 소릴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생각을 과감히 물리치며, 나는 나의 말 가운데 내가 아는 하나님의 그 좋고 좋으심을 말해주려 하였다. 아이에게 어땠니? 너는 어떠니? 하고 묻지 않았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너는 말하지 마라, 하고 말하였다. 다 끝나고 아이가 일어서면서 왜 자기는 말하지 못하게 하였는가 물었다. 나는 기꺼이 다음에 말해하고 말해주었다. 우리의 다음이 있을 것을 믿었다. 언제부턴가 내 이야기에는 온통 하나님의 이야기뿐인 것처럼 아이의 이야기에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할 것을 믿는다. 그리 말해주자 풋, 하고 웃었다. 어디 두고 보자? 하고 그제야 아이의 눈을 보았다. 참 여리고 순한 소녀의 눈이었다. 어쩌다.

 

나는 괜히 자꾸 울컥하였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8:26-27).” 주께서 우리의 탄식을 아신다. 성령이 대신 간구하여 주신다. 아이야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그리 애쓰며 죽어라 하고 사느라 살 거 없다. 살고 죽음이 모두 하나님께 있음이여!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