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스 1:1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시 146:6
바사는 페르시아를 가리킨다. 바벨론을 정복한 후에는 바사 왕을 바벨론 왕으로 부른다. ‘고레스 원년’이란 바벨론을 정복한 B.C. 539년을 말한다. 저를 돌이켜 포로 된 유다 족속을 본국으로 귀환시킴으로, 다윗의 가문을 보존하신다는 말씀을 응한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16).” 이처럼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참으로 놀랍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행하신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스 1:1).”
공연히 허전한 마음이 종일 뒤숭숭하였다. 괜히 또 일을 그르친 것 같고, 그나마 아이가 와서 내가 의도적으로 옮겨 적어두고는 하였던 성경구절이라도 쓰고 뭐라 말을 섞으며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도록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마침 친구의 전화가 있었고 저는 이번에 새로 산 성경을 보며 그 해석이 어렵다고 하면서도 더욱 더 말씀을 알고자 하였다. 나는 고레스 원년에 저가 행한 일만큼이나 친구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일이 신비롭다. 절대 바뀔 것 같지 않은 친구였는데, 이제 통화를 하면 그 내용의 대부분이 성경을 더욱 알고자 하는 것이다. 말씀이 저를 살리실 것이다. 나는 저에게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처럼 이를 읽는 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주가 하시게 해야 한다. 주가 행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곧 오늘 시인의 노래처럼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주가 행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시 146:6).” 나의 오늘이 그러하듯 친구의 오늘이 그러함을 감사한다. 아이로 인하여 마음이 어렵다가도 이처럼 돌발 상황처럼 하나님이 강권하시는 데 소망을 두게 된다. 이번 주일이야 친구들과 스키장에 간다고 했으니 그렇고, 다음 주일에 올까? 주중에 아이가 연락을 하고 자기 발로 올 수 있을까? 나는 자꾸 마음이 헛헛하고 속상하였다.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안 됐고 미안하였다. 부디 주께서 이루어가시기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주의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다. 나는 잊었어도 나를 이루신 이가 바로 그 말씀이시다. 한사코 부정하고 부인하며 허튼 길로 나아갔던 나에게도 주의 강권하심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로 세우신 바, 친구의 변화도 그러하여서 나는 아이에 대한 기도를 그칠 수 없었다. 주께서 그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고 주의 일을 형통하게 하시기를.
내가 친구에게 말하길, 성경을 너무 해석하여 네 이성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읽기와 묵상’을 같이 하라고 권하였다. 마치 음식을 먹을 때 그 영양소나 주된 건강요소를 다 알아가며 먹지 않아도, 우리 몸 안에서 골고루 영양소를 분배하고 공급하듯이 맡겨두는 ‘성경읽기’와 ‘묵상’은 집요하게 물고 뜯어 잡은 것을 놓치지 않고 생활에 적용하여 ‘나의 이야기’로 되새겨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허튼 게 없다. 우연은 없고 괜한 일도 없다. 하나님은 철저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관여하신다. 점심 시간동안 이를 설명해주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31:4).”
아무리 뜯어말려도 내가 나를 주체할 수 없는, 물고 늘어지는 것이 묵상이다. 아무리 성경이 어떠하다 해도 그것이 나의 삶과 상관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결코 성경은 고가의 예술품이 아니고, 박물관에 걸린 명화가 아니다. 매일매일 발려 먹어야 하는 물고기 두 마리이고 알뜰하게 뜯어 먹어야 하는 보리떡 다섯 개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이다. 이로써 새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내가 아는 누구 부부는 저들의 학식이 또는 그 열심이 저들로 하여금 말씀을 말씀으로 편히 먹고 마시게 하지 못한다. 주말마다 몇몇 학자들과 모여 어원을 연구하고 그 의미를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따지고 듦으로, 저가 늘 내게 한다는 소리가 ‘성경이 너무 어려워’이다. 십 년 전에도 그러더니 여전히 그런다.
머리로 알려고 하니 가슴까지 오는 데 더디고 못내 가슴에 이르렀을 때는 냉랭하게 식어서 삶에 적용이 안 된다. 듣기로 올 해 저들 부부가 성경을 다섯 번 이상 통독하였고 몇 권의 관련 서적을 독서토론으로 행한 것 같은데, 번번이 사는 데 전념하여 그 적용이 단편적이다. 의무감으로 기도하고 채무를 갚듯 선을 추구한다. 늘 그들의 실제는 고달프기 이를 데 없다. 왜 그러고 사니? 하고 아무리 평안을 말해줘도 허사라. 다시 보면 머리부터 드미는 것이어서 이해가 안 되면 용납이 안 된다는 투라 대체 저들의 하나님은 얼마나 갑갑하고 옹졸하기만 한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그래서는 친구에게 말하길,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네 머리로 자꾸 알려고 하지 말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맡겨라. 아무리 천재라 해도 성경을 다 풀어낼 수 없고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고작 스스로의 뇌도 10%를 다 쓰지 못한다고 하는 주제에 어찌 그 머리로 납득하고 이해하는 것만 믿으려고 하겠나? 오히려 알면 알수록 무식한 나를 마주하게 되고, 어떤 일이나 상황을 겪고 나면 나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점을 재차 확인할 뿐이어서, 나에게 성경이란 ‘그냥’ 좋고 좋을 뿐이다. 왜 좋은지, 어떻게 그렇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데도, 내 몸을 도는 영양소처럼 그것이 어디 어떻게 작용하여 건강을 돋우거나 새 힘을 더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령 누가 돌아가셨다. 저는 어느 대기업에 근무하였고, 뒤늦게 목사가 되어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남은 생을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을 배출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은퇴 후 자신의 남은 생을 일본 선교에 바치겠다고 준비하다 암으로 일찍 죽었다.
하다못해 이처럼 되어지는 인생사도 알 길이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디 나는 친구에게 그 열심이 저의 걸음을 더디게 하지 않기를, 교만의 늪에서 빠지지 않게 하시기를, 자신의 이해와 상식에 기초하는 하나님을 바라지 않기를. 아침마다 이 보잘것없는 묵상글을 보내주는데, 혹시 이 부분을 읽고 있다면 이를 묵상하기를.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우리의 이해가 우선이 아니다. 실제 하루 일과 중에 알고 하는 일보다 하고 나서 아는 일이 더 많다. 살고 보니 다른 게 인생이었던 것처럼, 내가 오늘 이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그 모든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선하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분의 차고 넘치는 사랑에 대해서도 나는 의지한다. ‘뭘 알아야’ 하는 게 아니다. 정작 우리가 아는 정도로는 숨도 못 쉰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107:20).” 말씀이 하신다. 나는 다만 몸을 맡기고 마음을 얹고 나의 영혼을 거기에 둘 뿐이다.
정작 성경공부가 중요한 것은 내가 더 무식하고 무모하고 무가치한 것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지, 이로써 아는 만큼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뛰어난 학식의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노라.’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살아나는 게 아니라 나는 죽고,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살아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행여 나의 친구의 알고자하는 열심이 오히려 그릇된 길로 접어들지 않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누구 부부처럼, 나는 저들의 열심을 사랑하나 그 열심이 저들로 우회하게 하는 먼 길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3-14).” 돌아보면 나를 돌이키신 이가 또한 친구도 돌이키셨고, 그와 같이 강권하심으로 오늘 본문의 고레스 왕을 감동시키셨다! 저가 왜?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 1:2-3).” 말씀 중의 오묘하심이 내 이야기와 다를 게 없고, 친구 이야기로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내가 알기로 저는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6:1).” 나는 다만 감동할 따름이다.
아이로 인해 마음이 어렵고 자꾸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서 더 생각할 수 있을 때 주께 아뢴다. 부디 저 '알바' 아이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러므로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2).”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으나,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8-9).” 주가 행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