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에스라 4:24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편 149:6
성전 재건이 중단되었다. 이를 방해하는 것은 사마리아인들이었는데, 자신들의 참여를 거절한다고 해서 훼방을 놓은 것이다. 저들의 참여를 거절한 것은 종교적 혼합주의에 대한 경계였다. 시편의 노래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있고 그 손에는 두 날 가진 칼도 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2).” 성전을 재건하는 일도 성벽을 구축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힘을 보태 뜨내기들이 드나드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는 말씀을 붙들고 가야 하는 길이다.
공연히 마음만 더 어려워졌다. 그냥 참고 했어야 하나 싶은 게 하루 종일 속상하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내 자리를 지키는 일, 여기에 두신 이를 생각하며 묵묵히 준행하는 것, 나는 스스로 다짐을 하듯 그리 여러 번 되뇌며 하루를 견뎠다. 하필 그때 누가 어쩌다 자신도 같이 짝하게 된 어느 성도와의 모임을 포기했다고 하였다. 못하겠다고 하니 담임 목사로서도 그러라고 할 수밖에 없었겠으나, 그런저런 사연을 들으면서 나의 궁색했던 변명과 같아서 속상하였다. 교회란 말 그대로 어중이떠중이 다 모이는 곳이다. 내 맘 같지 않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행 5:12-13).” 그러니 모두가 어디 한 맘 같겠나? 그럼에도 모이기를 함께 하는 것이 교회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와 같은 사명을 다한다는 일은 때로 속이 끊는 일이다. 내가 ‘저런 사람’과 같이 무엇을 도모해야 한다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지는 사람들로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자의 숙명이 아닐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러자니 그게 어디 내 맘 같은가? 행여 나 또한 내가 힘에 겨워 그만하고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는지, 저에게 들려주다 내내 그러한 마음으로 아팠다.
우울감이 몰려들 때는 끝도 없다. 오전에 오는 아이의 말투가 퉁명스러워 새삼 기분이 상했고 뭐라 나무라려니 감정이 더욱 지쳐서,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아픈 아이’니까, 내가 아니면 다른 데 갈 곳도 없는 아이인데, 그 가족들도 지쳐서 서로가 방기하듯 적당히 모르는 척 하는 것을… 뭐라 하다보면 속상하고, 가만있다보면 속이 터져서 나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쩔쩔매는 하루였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게 교회 일이라! 우리의 됨됨이나 어떤 유용함,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인물로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교회 성도의 덕목이 아니다. 오히려 어중이떠중이가 더 많고 별의 별 인간이 다 꼬여서 사람을 들들 볶는 게 실은 교회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재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음이다. 말 그대로 사람보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저 앨 내가 어찌 변화시켜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우선이 아니라 내 곁에 두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 그 의미로 무던함이 필요하였다.
깝깝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데서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다만 우리는 주의 성전에서 주를 송축할 뿐이다. 나는 아이와 말도 안 되는 말로 타이르고 꾸짖다가 일어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리 생각하였다. 주께서 내게 붙이신 일이라,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도 교회의 일감으로 여겨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도 아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6:15).” 이 또한 그 때가 되어 이루시는 주의 일이겠으니, 나는 아이를 토닥거리며 다시 길을 떠나듯 점심을 먹고 멀리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허전함이나 우울함이나 괜한 속상함 따위는 나의 고질적인 문제여서 그러려니 하고 두는 수밖에 달리 더 좋은 방법은 없을 듯하였다. 이내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2).” 아무리 깊은 밤 같다 해도, 성소를 향해 두 손을 들 따름이다. 여호와를 송축할 따름이다.
그러자니 늘 내 속에서는 신물이 올라오는 일이었으나, 오후께는 곧 신년예배 때 나주어 줄 성경구절을 글씨로 옮겨 적으며 혼자서 그 속을 달래야 했다. 누구에게 말을 하자니 구구절절 또 누구에 대해 험담을 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본의 아니게 저를 욕하게 되고 상대에게도 불쾌감을 부는 일이었다. 그만 말하자. 막내 동생의 전화가 왔을 때도 그냥 그렇게 됐어, 하고 말을 얼버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별 수 없는 일이다.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부패를 일삼는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게 돼 있다. 억세고 드센 순을 죽이는 일도 여간 힘에 겨운 게 아니다. 빛으로 사는 일은 또한 오죽하겠나? 그저 낭만적인 삶이 아니다. 빛을 보고 날벌레가 더 많이 꼬여들게 돼 있다. 말 위의 등경으로 사는 일이니 산 위의 동네로 사는 일 또한 별의 별 시정잡배들의 왕래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다.
나는 요즘 이 말씀에 꽂혀 여러 번 묵상하고 또한 되새기며 그 의미가 결코 낭만적인 게 아니라는 데서 놀란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결국 우리는 우리의 소임을 다하는 데 있어 필연적이고 숙명적인 고달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맡기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이다. 예수 믿는 일을 고상하고 우아한 일로 여기면서 우리의 오해는 보란 듯이 깨지게 되어 있다. 누구처럼 자기 수준을 운운하고 영적으로 도움을 도모하는 일 따위가 아니다.
저마다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산을 기웃거리다 등 비비려 드는 것이겠지만,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 우리는 완벽한 무엇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서 그 몫의 맡기신 이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다.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증축하는 일이 우선이 아닌 것이다. 종교적 혼합주의가 무서운 것은 그렇게 되었을 때 이게 다리가 어딘지, 팔이 무엇인지 애매하고 기이한 괴물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구나? 주의 일을 감당하지 않는 자는 시험에 들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주님은 늘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더하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
주가 지키신다. 곧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1-32).” 말씀을 붓글씨로 옮겨 적으며 나는 나의 약함과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였고 이에서 주의 권능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이내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오늘 내가 주의 이름으로 마주하고 대하는, ‘너와 나’ 사이에서 찬양할지어다! 곧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4).” 그러므로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