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가르치라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에스라 7:25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전장과 오늘 7장, 1차 귀환과 2차 귀환 사이에는 57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에스라는 2차 귀환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성전재건과 백성을 교육시켜야 할 책무가 따랐다. 저는 아론의 후손이다. 오늘 본문에서 아스닥스다 왕의 조서가 인상적이다.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스 7:25).” 그리고 저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나 곧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21-22).” 뭐지? 싶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히 신묘막측하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정도이다. 열어서 보여주시는 데까지만 알 수 있다.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 욥기서에 보면 엘리바스의 입을 빌어 이런 표현이 나온다.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4:12-14).” 이는 단순히 저의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말씀은 가만히 이르고 그 음성은 조용히 들린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어떤, 환상의 정도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상황도 그렇고 우리 삶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도 그러하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사 6:8-9).” 이를 저만치 서서 들으면 고깝다. 마뜩치 않게 들린다.
한데 실제 삶에서 이를 체험하는 사람은 그 의미를 되새긴다. 환상이나 어떤 몽환적인 접근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삶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손길은 오묘하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레미야도 같은 증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4-5).” 어쩌다 우연히 내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6).” 우리는 다만 두렵고 떨릴 따름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보내시고 말하게 하신 이가 따로 있다.
비록 엘리바스의 증언이 모호하나,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욥 4:15-16)” 저의 증언은 틀리지 않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17).” 이어 빌닷과 소발의 증언도 그와 같이 장황하고 애매하긴 해도 엄연히 욥기도 지혜서로 분류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하시다.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겔 2:2).” 우리의 언어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무한하시니 그 사이에서 애매함은 누구에게는 함정이고 누구에게는 묵상이 된다.
전날에 음식을 잘못 먹어서 장염에 걸린 아이는 오지 못했다. 덕분에 종일 들어앉아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다. 날은 흐려 쌀쌀하였고 아무하고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오후께 주인이 건너와 이런저런 사정을 털어놓고 한 달에 얼마씩 새해부터는 관리비를 조금 올려야겠다고 하였다. 공연히 저는 미안해하고 나는 괜찮다고 일렀다. 새로 시작한 옆 사무실에 손님이 없으니 답답해하는 이에게 영양갱을 두 개 나누어주었다. 보면 성경에 묘사된 우리의 모습이 같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저들이 우리보다 열 배는 더 형편이 나을 텐데…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체험이 본질은 아니다. 초자연적인 경험이 우리의 일상을 당할 수는 없다. 때로는 지긋지긋하고 또 하루가 그저 하루인 것 같이 흘러가지만 그와 같은 때에 세미한 음성과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산다는 일은 참으로 기묘하다. 결국의 본질은 하나님이다.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일도 아니고, 누구 그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일상은 우리를 자주 원점에서 생각할 것을 일깨운다. 늘 사소하여 보잘것없는 것 같은 하루하루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보고 깨닫게 한다. 우리 기독교의 영성은 그러므로 주목하는 것이고 듣는 것이다. 듣는 일은 귀로 듣는 것뿐 아니라 스며드는 의미를 갖는다. 누구의 표현처럼 말씀은 ‘청음초’다. 눈으로 볼 수 없이, 흐린 날 또는 한밤중에, 어디 벽에 막혀 귀를 기울여 가늠할 수 있도록 전방에 세운 초소다. 그리하여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 그렇듯 나의 청음초소는 설교 원고를 작성하거나 이처럼 묵상글을 쓰며 찾아보는 말씀 구절이 아닐까?
말씀이 귀에 들리고 우리 속에 들어온다. 내가 말씀을 먹은 줄 알았는데 말씀이 나를 삼키신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낀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이를 맛보아 알 뿐이지 아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희미하고 막연할 때도 많다. 그러해도 묵묵히 말씀 붙들고 나아가는 것, 이보다 더 큰 기적이 나에게는 없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이는 전적으로 주시는 일이지 내가 취하여 갖는 게 아니었다. 나는 누구처럼 대단히 애써 노력한 사람도 아니고, 굳은 결심으로 오늘에까지 이르며 말씀으로 결행하며 사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아는 나는 누구보다 안이하고 나태하며 무력하고 나약하다. 그런 내 안에 새 영을 주심으로 새 마음으로 움직이게 하신다. 나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더하신다. 곧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25).”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누구처럼 나는 자부하여 나의 노력을 논할 자격이 없다.
다만 알 뿐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그리 여기는 막연한 느낌이나 허황된 믿음이 아니라 실제의 하루하루에서 문득, 어떤 일에서 또는 누구의 사연에서 부득불 알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17:7-8).” 이와 같은 견고함은 나의 학식이나 애씀이나 수고나 희생과 헌신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면 나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내 몫을 취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유구무언이다. 이처럼 가만히 말씀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염치가 없어서 말이다.
마음에 두시는 일로 또는 아이로 이제는 고질적으로 숨쉬기가 답답하여 안정제와 함께 별도의 약물을 복용해야 하지만 그럼 그 또한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일일이 내가 왜 이러지? 하고 병원엘 가봐야 내과는 외과적인 문제로 외과는 내과적인 문제로 원인을 찾다보면 정신과적인 문제라고 할 뿐이니… 어느 날은 여기가 아프고 어느 날은 저기가 아프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견딜 만큼 견디면서, 못 참겠으면 병원에도 들락거리면서 그러다보면 알겠지? 성경은 늘 이 땅에 얽매이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그것으로 힘들다가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낮에는 성경구절을 옮겨 쓰고 코팅기로 덧씌웠다. 신년 예배 때 말씀으로 하나씩 나누어줄 요령에서다. 말씀밖에 답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더 세미한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지, 나는 글방이라는 청음초소에 앉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다. 그러할 때 말씀은 이르신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라.’ 가령 설교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일주일간 읽었던 성경이나 책이나 어떤 누구와의 말이나 상황이 계기가 된다. 그래서 초안을 잡고 갈피를 정해두었는데, 실제 또 그것을 작성하다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줄기를 만나기도 한다. 수십 장의 메모나 성경구절에서 걸러내고 추려져서 예닐곱 장으로 정서가 되기까지, 하긴 나는 주방장처럼 또는 청음초소를 지키는 병사처럼, 종일 식재료를 다듬듯 말씀을 또는 누구의 책을, 어떤 일을 메모하거나 귀를 쫑긋 세워 듣는다.
그럼 성경의 목소리는 하나로 들린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이것이 오늘 우리 일상의 푯대가 아닐까?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막연히 경례를 하고 예를 갖추어 의무를 다하는 병사가 아니라, 섬기고 떨며 그 일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의무만 있는 게 아니고 권리도 있다. 이 즐거움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저들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잠시 건너와 사정 이야기를 하는 사장의 눈에는 어찌 보여졌을까? 새로 개업하고는 하루 종일 손님이 하나도 없으니 그 조바심으로 문 앞에 서 있는 누구의 심정은 어떨까? 나는 누구처럼 돈이 없으나 쪼들리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으나 할 일에 겨워 즐거워할 줄 아는 일이었으니… 나는 굳이 부러울 게 없다.
이를 오늘 시인은 단언하였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 그러니 다른 무엇이 조건이 되고 의무가 되어 나를 옥죌 수 있겠나? 나는 다만 구할 뿐이니,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8).” 다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