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에스라 8:21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시편 3:3
오직 하나님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 요즘은 점심시간 때 친구와 통화를 한다. 친구는 여러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생기는 의문도 있고 교회 생활을 하면서 궁금한 것도 있으니, 무슨 이야기 끝에 하나님 외에 다른 목적이 우선하면 하나님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일렀다. 가령 이 땅의 평화나 가정의 화목을 추구하기 위해 주께 나오거나 병 고침과 삶의 안정을 찾기 위해 주를 바라는 것이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듯 섬기게 된다. 시편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40:8).” 하는 고백이 우리 믿음의 중심이다. 믿음으로만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사람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요구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그것까지 믿음 안에서 주를 바라는 데 유용할 따름이다. 친구는 조용히 귀 기울여 들었고 30여 분간 그처럼 통화를 하며 성경공부를 하는 셈이 되었다. 부쩍 열심이라 나는 그 열심도 경계하였다. 스스로의 열심이 스스로를 우쭐하게 할 수 있다. 마치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자기의 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 그런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나는 늘 이 말씀 앞에서 두렵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의 일이라, 바울 사도의 다짐도 그런 의미로 읽힌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다들 참 열심이라,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고 산책을 좀 하다보면 서너 명 이상의 전도자들을 만난다. 무슨 종파인지 알 수 없으나 명상을 운운하고 우리 몸의 막힌 기를 순화시킨다며 전단지를 건네는 자도 있고, ‘신천지’는 극성스럽고 저돌적으로 접근하며, 잊을 만하면 ‘하나님의 교회’ 사람들이 달라붙는다. 그 추운 데도 그리 열심을 다하는 것을 보면 참 갸륵하기는 하다. 그 옆에서 돈을 받고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가히 살아가는 일이 눈물겹기도 하다. 나는 친구에게 말하길 너무 지나치게 들썩이지 말 것을 일렀다. 지나치다는 것은 자기 기준을 내세우는 열심이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우리는 다만 이 모든 일에서 자유하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열심을 다해 주를 섬기는 것을 뭐라 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우리는 대단한 존재가 아닌 게 문제다. 사람은 영락없다. 내남없이 퇴락하고 변심한다. 올곧은 삶이란 음흉한 속내를 감출 때나 그리 보이는 것이다. 너무 사람 믿지 마라. 실제 저와 함께 성경공부를 가르친다는 ‘집사’에 대해 여러모로 궁금하였으나 너무 따져 묻지는 않았다. 서로의 교제와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기는 한데,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좋다’는 식이어서 주의를 주기는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오늘 본문도 이를 상기시킨다.
2차 귀환을 허락하고 성전재건과 개혁을 독려하는 아스닥스다 왕의 선처가 있기는 하였으나 에스라는 무엇보다 잊지 않았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스 8:21).” 열에 아홉이 돕고 호응하고 선의를 행한다 해도 그게 다가 아니다. 사람이 좋아봐야 사람이다. 저의 헌신과 수고와 희생도 그때뿐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다. 나는 이제 공공연하게 말한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좋을 때나 좋은 것이다. 사람 별 거 없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내게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언급하시는 것 같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다른 누가 행하는 일이 아니다.
지혜자는 더욱 분명한 어조로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이 안에 우리 삶의 기준이 다 담겨 있다. 하나님은 엄연히 하나님이시다. 내가 싫고 좋고의 존재가 아니시다. 하나님이 굽게 하시면 굽고 곧게 하시면 곧다. 어쩔 것인가? 이를 누가 펴거나 거스를 수 있겠나? 그래서 인생의 원리는 형통하면 감사하게 기뻐하고, 곤고하면 되돌아보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만고의 진리다. 사람 볼 거 없다. 우리 교회 목사님, 누가 그러는데, 누구는, 하는 따위의 말은 그래서 모두 위태롭다.
우리는 자주 자기 판단의 유혹에 빠진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내가 잘 하고 있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해 봐야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 같은데? 하는 회의나 갈등은 필연적이다. 별 수 없는 일이다. 성령으로 산다는 게 날마다 불길 같은 은혜를 체험하며 뜨거운 열망으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결단의 삶을 사는 게 아니다. 그렇게 살 수도 없고 사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밍밍하고 싱거울 뿐 ‘이게 맞나?’ 싶은 때가 더 많다. 그것이 일상의 한계다. 모든 열심 뒤에는 자기만족이 있거나 의구심이 있다. 별 수 없는 다툼이다. 그럼에도 그것까지 주의 것이라, 주께 맡긴다는 것은 실제 나의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아내는 공부방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다 지치고는 한다. 라면을 끓여주고 하기 싫어 죽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다독이며, 부모에 대해 자신의 가정에 대해 힘겨워하는 아이에게 그저 먹을 것을 내어주고 들어주는 것뿐이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싶어!’ 하는 아내의 푸념에 잘하고 있는 거야! 하고 격려하였다. 내가 뭘 꼭 해야 하는 것이 주의 일은 아니다. 주께서 하는 데 있어 나는 다만 도구라. 그 자리에서 쓰임을 받을 뿐이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다. 금세 허공으로 흩어져 아무 쓸모없는 메아리처럼 공허할 때도 있다. 아침마다 아이를 마주하고 하나마나 한 소릴 하고 하나마나 한 것을 일관되게 하면서, 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고 더는 되묻지 않는다. 나는 다만 보내셨으니 감당할 뿐이다. 감당할 수 있는 그 능력도 주의 것이라.
어제는 캘라그라피로 쓴 성경구절들을 코팅하고 자르는 일을 같이 하였다. 돌아가면서 아이가 그 일을 같이 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카톡을 하였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였다. 늘 소외된 자로 살고 있었구나! 쟤가 뭘 알겠어? 하고 여겼던 은연중의 무시와 괄시가 아이의 깊은 상처를 더했던 것이다. 되묻고 자주 당부하고 또 확인하는 일은 나 또한 노파심에 그러고는 있는데, 일정하게 자르지 않아 그만두게 할까하다 것도 의미가 있겠다싶어서 부탁을 했던 일인데, 그 일을 맡겨주셔서 감사하다니! 이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서 그것이 불안으로 고착되어 그러는 것인지, 실제 심장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지, 요즘은 아예 정기적으로 숨 쉬기가 어려워서 어떤 불안이 가중된다. 안정제와 함께 별도의 약을 먹고 진정이 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때로는 두렵다. 아내는 자꾸 그런 나를 두고 마치 내일 죽을 사람처럼 산다고 뭐라 한다.
그게 아니라,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일뿐이다. 그리 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주를 경외함이라. 다만 주를 경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지나치게 이 일 저 일에 적극적인 게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주를 더욱 바라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하여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시 3:4).” 곧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 이는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 오늘 또 새 날을 허락하셨으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