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느헤미야 13:23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편 18:30
바사의 관리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한 후 바사로 돌아갔다가 1년 뒤 귀환한다. 그 사이에 유대인들은 성일을 어기고 이방인과 결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였다. 본문을 읽으며 참으로 가관이라, 다들 자기 생각이 있는 법이니까! 뭐라 한들, 아무리 그래도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느 13:23).” 이게 가만 보면 자식들이 곤욕이라. 느헤미야는 주께 아뢴다.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0-31).”
우리가 주께 아뢰고 주만 바라고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가만히 보면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형태가 모두 그 때문이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29).” 먼저는 그 안에 불의가 있다. ‘불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사는 일이다. 그리고 추악하다. ‘추악’은 죄를 즐기는 일이다. 우발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고, 고의적이거나 의도적인 것이다. 모세는 이를 거부하였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그리고 ‘탐욕’은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일이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추구하는 일이다. 소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나 속으로는 늘 탐욕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악의’는 내면에 숨기고 사는 악함이다. 본성적으로 그러해서 이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길을 성경은 제시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결국 숨겨놓은 악의는 내 안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곪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기’는 살인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남 꼴을 못 봐주겠는 샘냄이다. 즉 정욕의 문제다. 넘치는 욕구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1-2).” 그리고 오늘 날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분쟁’은 타인을 내 의견에 굴복시키고자 하는 일이다. 존중은 없고 용서는 가당치도 않은 마음이다. 별 수 없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내가 중재를 하고, 어디 편향되어 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 우리 안에 두루 남아 있는 속성이다.
‘사기’는 너무 흔한 것 같이 남을 속이고 취득하는 모든 것이다. 도둑질하는 원인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수 7:11).” 다음으로 ‘악독’은 의도적으로 악한 상황을 통해 이익을 도모한다. 어쩌면 이 현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이를 조정하고 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3-15).” 또한 ‘수근수근거림’은 끼리끼리 문화에서 얻는 즐거움이다. 험담하고 뒷담 까는 일로 이는 마치 별식 같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자기 말로는 콘텐츠가 약하다. 남의 말을 해야 돋보인다. 그러니 별 수 있겠나? 당시 저들은 왜 예수를 믿기 어려웠냐 하면 바로 이 수근거림 때문이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요 6:41-43).”
또한 바울은 우리가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생겨나는 증상으로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30-31).” 그 가운데 ‘비방’은 남에 대해 덧붙여 말하는 일이다. 속여서라도 자기의 악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그 속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안 믿고 자신의 의을 의지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람을 앞세워 사람으로서의 죄를 옹호하는 일이다. 그럴 수 있지, 그게 뭐 나빠? 다 그런 거야! 하는 따위의 감정적인 대응 그 이상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2).”
다음으로 ‘능욕’은 교만하고 잔인한 일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목 박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행위다. 군중심리 같은 그 이상의 악의적인 발작이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또한 ‘교만’은 자주 다루는 의미이겠으나, 한 마디로 정의하면 자기를 우선하는 마음이다. 자기위주의 생각과 자기위주의 판단과 기준이다. 모든 시간과 공간과 이 우주와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위주로 하여 돌아가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8-19).”
끝으로 ‘자랑’하는 것은 헛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우쭐하는 일이다. 스스로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거나 그래서 상대를 자기 앞에 굴복시켜고 하는 의도가 깔렸다.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일이다. 나아가 그러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하나님을 가소롭게 여기는 것이다. 그 외에도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나 우매함이나 배약과 무정함과 무자비함이 있다. 부모를 거역하는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로써 십계명에서의 다섯 번째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마 15:4).” 설마, 하면서 안이하게 굴 때 드러나는 처사다.
‘우매’는 무지다.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것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시 38:5).” 저의 특징은 도무지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덧붙여 ‘배약’은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다. 처음 사람 아담이 먼저 범하였던 일이다. 당시 약속 언어를 저는 경홀히 여겼다.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하시는 말씀에 대해 그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4).”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이 ‘죽을까 하노라’ 하는 말씀 정도로 바뀌는 사소한 일 같으나, 우리는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 믿음이란 약속의 다른 이름이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끝으로 ‘무정’과 ‘무자비함’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혐오스러운 일이겠으나 그것으로 돈벌이를 하는 형국이니, 정이 없다. 전혀 관심이 없고 아량도 없다. 그러니 그 속에는 분이 가득한 것이다. 이를 표방하는 게 온갖 게임의 구조다. 죽여야 산다. 것도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레벨이 올라간다. 스릴이 넘친다. 분을 풀기는커녕 그것으로 돈벌이도 한다. 한데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아주 잠깐 어쩌면 1년 남짓 느헤미야가 유다를 떠나 있을 때 자행된 일로는 참으로 우리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아, 우리의 본성을 어쩌면 좋을까?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0).” 알고도 그러니 겁이 없다. 나는 두렵기만 하다. 결국 주 앞에 엎드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30).” 나를 지키시고 막아주실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35).” 주밖에 나는 없다. 그러므로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