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전봉석 2020. 1. 14. 07:06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에스더 2:1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편 20:7

 

 

어쩌다 일이 그리 되는 경우는 없다. 또는 그 일이 나를 위해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모든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48:9).” 모든 우연은 하나님의 족적이다. 오늘 말씀을 읽다 그런 생각을 붙든다.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2:17).” 어쩌다 그리 된 일이 아니다. ‘~ 후에벌어지는 일은 오묘하다. 말씀은 우리로 어쩔 것인가? 하고 되물으시는 것 같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20:7).” 나의 기도는 언제나 나를 위하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기까지 그 모든 일의 되어지는 과정이 참으로 놀랍다. 하나님은 온전히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비밀의 경륜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1:9).” 그 목적은 하나다.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통일되게 하시는 것,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 이를 알게 하시려고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셨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8).”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데 필요한 지식을 주신 것이다. 곧 우리의 충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25:13).” 이 구절의 말씀은 목사 안수 받을 때 들었던 어느 원로 목사의 설교 본문이었다.

 

충성이란 잘 듣는 것,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그러므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여기 바로 오늘 나를 두신 곳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 일,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2).” 그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때론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도 그의 영광에 찬송이 되게 하시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12).” 나는 사실 엉터리다. 종종 나를 돌아볼 때 누구처럼 뭐가 어떻고, 누구처럼 무얼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라 그저 송구할 따름인데, 이는 모두 주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12:28).” 모든 게 주가 하시는 일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이를 짊어지시는 이가 계시다. 마치 내가 곤욕을 당하는 것 같으나 이는 모두 주 안에서의 일이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나의 이 모든 평화가 주께서 대신 징계를 받으신 일이다. 그러므로 나음을 받았다. 나의 죄악을 담당시키셨다. 그러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주가 이루시는 일에는 모든 게 합력한다. 오로지 하나의 선을 이루는 데 목적을 둔다. 이는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하시려는 것,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12).” 곧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5:8).” 그러한 말씀 앞에 가만히 있는 것. 때론 이해가 안 되고 그 길이 아닌 것 같을지라도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9).” 이 간단명료한 진리 앞에 오히려 나는 안도한다. 늘 번번이 엉뚱한 생각과 어벙한 소리만 하기 일쑤지만 그게 마땅한 것이었다. 도리어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려고. 곧 주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시는 일이었으니,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10-11).” 나는 그렇게 번번이 나의 이율배적인 생각과 행동과 삶을 주께 아뢰며 송구스러워할밖에.

 

아이가 감정이 격해 여러 번 되풀이 하여 기도하였다. 찬양을 듣다가 또는 글을 쓰다가 나는 저의 조울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처음에는 겁나고 어렵기도 하였으나 그게 또 저 아이에게 두신 세계라면 이 모두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려니, 나는 모르는 척 차를 끓이고 아이 앞에 내어주었다. 그러는 데 있어 어찌 생각이 많지 않겠나? 나는 늘 허당이라 스스로 그 웅덩이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그럴 때면 주는 나를 사랑하심으로 징계하신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12:6-8).” 그래서 하나님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여기는 세상을 뒤집어엎으신다. 과연 저들이 바로의 폭정이 없었다면 애굽에서 부르짖었겠나? 적당히 안주하며 살던 땅을 떠나려고 하였겠나?

 

왜 그처럼 나를 못 살게 굴 듯 형편과 사정을 궁벽하게 하셨는가, 돌아보면 그게 다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하려 하시는 거였다. 여섯 개의 카드를 돌려막으며 적당히 그럼에도 안주하며 계산하고 나름은 산다고 사는 생활에서 하나님은 나를 돌이켜 세우시려는 것이었으니, ‘징계는 그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이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3-15).” 그래서 이제 와 보면 잘 풀리는 일이 결코 잘 되는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차라리 그 애가 몇 차례 더 그 어려운 행정고시에서 떨어졌더라면 어땠을까? 그 애도 차라리 훅, 하고 공황장애가 왔으면 어땠을까? 돌아보니 너무 잘 풀렸다.

 

다들 바라는 일이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아니 되는 게 낫다. 실패가 성공이다. 그렇게 술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더니 결국에는 그 일이 모두 자신이 잘나서 된 줄 아는 데야.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은 다르다. 그 기준부터가 다르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과정 자체도 다르다. 모르드개에게 처량하게 의지할 데 없는 조카딸 에스더가 있었다. 그 신세를 놓고 보면 기구하기 이를 데 없으나 하나님이 저를 바사의 왕후로 세우시려고, 저를 통해 그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우리 사람이 감히 상상도 못할 일 가운데서 벌어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는 것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서른여덟 해 된 고착된 삶의 현장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5:8).”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성경 어디를 펴도 다 한 곳으로 그 의미는 통한다. 모든 인물과 사건과 배경은 그 시기와 역사가 다르다 해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10).”

 

오후 두 시가 돼도 아이는 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늘 그러려니 하는 일이라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두었다. 모두 자기 위주로 산다. 우주가 온통 자기를 중심을 돈다. 애나 어른이나 죄의 증상은 다르지 않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여서 그냥 두었다. 나는 여기에 있을 뿐이다. 나를 두신 자리라. 오늘은 녀석이 월차를 내고 하루 쉰다고 하면서, 그래서 한 아이도 같이 와서 모처럼 당구도 치고 놀기로 했다. 그러는 거다. 그냥 나는 거기에 있다. 그 자리에 두신 이의 뜻은 알 수 없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닐지라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5:2).” 세상 둘러볼 거 없다. 안주할 곳이 못 된다. 의지할 사람도 없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그러므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139: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