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전봉석 2020. 1. 15. 06:59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에스더 3:4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믿는 자로서 그 믿음을 지키는 일이란 단순히 느낌이나 그 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바사의 2인자라 할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는 모르드개의 기개는 단지 저의 개인의 의지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 향한 굳건한 믿음이 실은 이처럼 무모한 결행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매우 노하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5-6).” 모름지기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경우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물러설 수 없는 절개가 필요한 것이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5:3).”

 

모처럼 월차를 내고 아이가 쉰다고 하니 같이 와서 시간을 보내주고 가는 아이의 마음 씀이 고왔다. 앞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식사를 하고 당구도 치고 왔다. 그렇게 누가 누구와 같이 하는 일이 단순히 어떤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어야 한다.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하려고 한다고 해서 또 되는 일도 아니다. 가족이어서 지치고 힘들 수도 있으나 나는 저의 친형제보다 주의 마음으로 위하고 대하는 섬김이 더 크게 다가왔다. 오후에 매일 오게 한 아이에게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몸에 밴 저의 생활은 좀처럼 벗겨지지 않고 이는 내가 이르고 말로써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습관은 중독이다. 중독은 마비다. 자기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통계에 따르면 은둔형외톨이로 늙어 중년이 되기까지 일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가 엄청나다고 한다. 하긴 니트족이라 해서 스스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기생하듯 사는 사람들도 늘어간다고 하니, 다들 취업이 안 돼서 그렇다지만 실은 몸에 밴 습관 때문이다. ‘일과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와 같은 생활 태도가 저들의 영혼을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주장에 동의한다.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마뜩찮은 것이다. 할 일은 많다. 하다못해 월차를 내고 쉬는 아이를 우리가 같이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은 그 일이 뭐라도주어진 일에 성실한 아이의 생활 태도 때문이다. 그런데 저마다 면접에서 당한 모멸감 또는 일터에서 생긴 어떤 낭패와 실망을 이유로 그것을 은닉하고 스스로는 할 만큼 했다는 식으로 눌러앉는 것이다. 그런 일로 보면 이 아이는 쫓겨나기도 여러 번, 심지어 아이엄마가 찾아가 사정을 하고 빌어보기도 하였는데그렇게 전전긍긍하면서도, 파트타임으로도, 최저임금만으로도 기꺼이 감사함으로 주어진 일에 감사하는 것이었으니! 무슨 일로 아이엄마와 카톡을 하다 내가 아는 어떤 정상인보다 아이가 정상이다. 스스로 정상이라고 여기는 내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 아이보다 성실하고 정직한 자를 보지 못했다. 꿋꿋하게 해야 할 일은 마다하지 않고 하는 아이의 성품에 대하여 나는 주께 감사하자고 일렀다. 사지육신 멀쩡하고 정신도 온전한데 그 영혼이 병들고 상한 심령으로 은둔의 생활로 문고리 붙들고 맴도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굳이 통계를 운운하지 않아도 내 주변에 보면 널렸다.

 

정권을 탓하고 정치를 욕하고 제도가 문제인 것처럼 거품을 물어대지만 실상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무슨 정치를 펼친다 해도 저들은 또 욕하고 들어앉아 신세한탄만으로 허송세월의 이유를 삼을 것이다. 어떤 녀석은 기어이 잠수를 탔고 누구는 자기 몸을 굴려 성에 기생하며 산다. 더는 뭐라 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오늘도 묵묵히 주어진 일에 충실한 아픈 아이의 삶을 축복한다. 누구는 온전하지 못한 정신상태 때문인 것처럼 평가하겠으나 병든 영혼은 그 의미를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옳은 것이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26:16).” 결국 오후 두 시에 오는 아이에게 화요일과 목요일만 오게 하였다. 그것도 잘 하려는가 모르겠으나 매일 오라 해도 이틀이 멀다하고 무슨 일이 생기고 어디가 아프고 그때마다 변명을 하는 쪽이나 들어줘야 하는 쪽이나 서로가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 모르드개의 행동은 무모하기까지 하다. 저의 행동으로 온 유다인들이 몰살당하게 생겼다. 그저 스스로 높이는 바사 왕 다음의 2인자 하만 앞에 절하면 그만일 텐데, 저의 우상숭배와 더러운 행실에 대해 굴복하는 일이어서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3:4).” 일이 참 급박하게 돌아간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모르드개의 허무한 절개를 욕할 것이다. 뭘 꼭 그렇게까지! 하며 상식적인 선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7:7).” 보면 글방은 싫지 않은데 교회로서는 싫은 것이다. 글방 선생으로서는 좋은데 목사로서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앞서 누구의 단도직입적인 선언처럼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알바로서 그 곳에 가는 일 아니면 자기 여식은 거기에 보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런 거 보면 모르드개와 같은 신앙의 절개도 엄연하지만 안 믿는 자의 자기 옹호나 가치기준도 엄연한 것이다. 밖에서 보면 둘 다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때로는 답이 없다. 나는 저런 사람을 어찌 대해야 할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매일 두 시에 오는 아이에게 그렇다면 화요일 목요일만 오라고 한 것도 궁여지책이었다. 어쩌면 매일 기다리며 시달리는 일에 내가 항복한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그 일을 숨기신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45:15).”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족적을 어찌 가늠할까?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5:2).” 그 일을 헤아려 알게 하심으로 더욱 더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두 아이를 대할 때면 그래서 온전하다고 여기는 아이보다 온전하지 못한 아이를 더욱 사랑한다. 그럼에도 그 적은 일에 충성하는 아이를 귀하게 여긴다. 분명히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5:8).” 그러니 이 일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9).” 주를 경외는 길밖에, 이에 찬송이 나오게 하신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21:13).” 나는 아이 둘과 잠깐 같이 성경공부로 아가서 2장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위하고 사랑하시는가를 강조하였다. 우리로 함께 하게 하실 때 우리 안의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2:15).” 누구 탓을 하고 정치를 욕하고 사회를 비관하는데 그게 다 자기 합리이다. 그래서 안 하고, 그래서 게을러도 되고, 심지어 그래서 히키코모리를 자처하는 자신의 패배하는 인생에 대하여 궁색한 변명일 따름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된다. 주가 주시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안의 작은 여우는 틈틈이 이유를 파헤친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하는 식의 변명과 자기 합리에 급급하게 한다. 뭘 좀 하려고 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처럼 설치는 까닭은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이게 곧 열매가 맺힐 것이기에 설쳐대는 것이었으니!

 

두 성실한 아이를 앞에 두고 이처럼 먼저 말씀을 나누고 하루를 함께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하였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21:1).” 우리의 기쁨의 근원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5).”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