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에스더 5:2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6
되는 일과 그 너머의 일은 다르다. 죽을 각오로 왕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여 에스더를 더욱 사랑스럽게 보게 하신다. 왕후 에스더의 초청으로 하만은 득의양양하여 자신이 그만큼 득세한 줄 안다. 다만 궁궐 앞에 엎드려 있는 유다인 모르드개가 눈엣가시라, 자신을 과시하려 다음 날 저를 높은 장대에 매달 계획을 세운다. 왕이 부르기 전에 왕 앞에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저들은 기도로 준비하였고 그 결과는 ‘매우 사랑스럽게 보였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에 5:2).”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시작한 일의 원인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므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아이가 머리를 빨갛게 염색을 하고 왔다. 아프다고 하더니 그럴 시간이 있었나? 나는 아이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쇠귀에 경 읽기라고 아무리 뭔 소리를 해도 소용없다는 데 싫증나서였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아무리 밀어내도 아이가 들러붙는다. 글쓰기는 접고 성경공부로 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을 오든 한 번을 오든, 주일까지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기로 했다. 나는 상담이란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도 그리 이른 것은 글쓰기니, 공부니 하는 것보다 상담이 필요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신기한 건 아이가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러겠다고 하고 하지를 않으니까 문제지만 그쯤 되면 안 한다 그러고 떨어져나갈 것도 같은데, ‘아이의 영혼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부를 떠나서 아이가 빠져 있는 무력증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니 어쩐다? 문득 드는 판단이 ‘잠언으로 자기분석 글쓰기’ 이를 굳이 숙제로 내줄 필요는 없다.
너에게는 생각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실행이 필요하다. ‘나중에’가 아니라 ‘당장’ 그리해야 한다. 나는 아이에게 일러 ‘여섯 가지 실행’의 방향을 잡았다. 첫째, 성경을 읽어라.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나는 아이와 같이 성경을 읽기로 했다. 그때마다 암송을 시켜야겠다. 시작은 주기도문이었다. 말로는 오는 4월 부활주일에 아이를 학습세례 교인으로 세운다고 하면서 정작 나는 아이에게 성경을 읽힐 생각도 않고 있었다. 둘째, 성경을 공부해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죽었다 깨어나도 아이의 성적이 오르고 갑자기 그 생활이 성실해질 리 없다. 그렇다면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읽게 해야 한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 나는 저 아이가 빨갛게 머리를 염색한 것은 그 내면의 부끄러움 때문이란 걸 안다. 어떠하든 우리는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들이다. 이를 ‘힘쓰라.’ 그저 막연하게 벼락치기 하듯 성경을 읽고 쓰고 암기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힘써 알아야 한다.
셋째, 성경을 두고 기도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저 내 요구나 감상을 아뢰는 게 아니라, 말씀을 기초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5).” 우리의 삶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하고 이를 알게 하도록 빛을 비추어야 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6).” 넷째, 성경을 찾아라.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그 목적은 하나이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잠 2:1-5).
보면 누구는 숙제처럼 성경을 필사한다. 성경을 통독하고 성경을 필사적으로 읽는다. 기특하고 갸륵한데 그 의도가 불순하다는 느낌은 무얼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잘 되고 모색하는 일이 잘 풀리기를, 그리하면 주께서 더 복을 주실 것을. 마치 하나님께 거래를 하듯 그 수고를 아끼지 않는 데 대해 안타까움이 든다. 순순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욱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경으로 생각하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말씀 없는 생각은 허망할 따름이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하는 아이의 말을 부러 끊고! 너에겐 생각하는 일보다 실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단호하게 이른 것은 그 때문이다. 여섯째, 성경으로 말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말씀의 지혜로 권면해야 한다. 나는 상담가가 아니다. 저 아이는 나를 찾은 내담자도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삶을 개선하는 게 아니다. 영혼의 문제다. 내가 너를 글방 선생으로 대할 수 있겠냐? 교회 목사로 대할 수 있겠냐? 나의 질문은 엉뚱하였으나 아이는 꾀가 멀쩡하여 목사로서 자신을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 맞다, 글방 선생으로의 난 ‘너 같은 애’가 제일 싫다. 전에 같으면 그냥 그만두면 될 일이다. 못 하겠다 하고 말면 그만인데 왜 이처럼 애태우는가 하는 것을 아이도 안다. 우리에게는 주의 마음과 주의 사랑이 필요하다.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가 필요하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나는 그리 다짐했고 아이는 돌아오는 주일까지 암기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과연 그럴까? 나는 다음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어제는 아이 오기 전에 오늘로써 그만둘 생각으로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내가 생각하는 일과 다르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이는 곧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8).” 그러니 더욱 성경으로, 말씀으로 주를 묵상하고 그 뜻을 헤아려 알게 하시려고, 나는 아이의 빨간머리를 보며 여러 번 생각하고 또한 놀라웠다.
결국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하시는 예수님의 결연하신 말씀은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히키코모리’가 괜히 늘어나는 게 아니다. ‘니트족’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저희의 나태와 게으름과 자기합리는 단순히 이 땅에서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문제로 영생의 일과 직결된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에 사활을 거신 것이다. 우리에게 맡기시는 사명도 그것이다. 내가 저 애를 잘 이끌어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가고 보다 나은 삶을 사는 젊은이로 성장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글방 선생으로서의 나는 그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아이의 지칭처럼 이제 나는 하나님의 교회의 목사로서 저 아이를 나의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생의 목표가 아닌 영생의 목적으로 이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아픈 아이’는 감정이 고조되어 여러 차례 카톡이나 전화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여왔고, ‘토요일에 오는 친구’는 여전히 일과 여자 문제로 같은 말을 되풀이 하듯 전화를 하였다. 모두가 ‘빨간머리 아이’처럼 자기감정에 치여 살 수가 없다. 누구는 경쟁하듯 하루에 두세 장씩 성경을 필사하였고, 죽어라 하고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모두가 그러저러한 사정과 여건에 휘말려 살고 있지만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단언하건대 저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오늘도 나를 인도하신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늘 암송할 때마다 큰 위로가 되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