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하니라
에스더 8:8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편 26:7
돌아보면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게 없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자랑할 것이 없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오늘 에스더서의 내용은 새삼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경험하게 한다. 곧 죽을 자였는데 온 유다인이 모두 영광을 본다.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에 8:15-16).” 하나님의 일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시 26:7).” 우리의 소망은 주의 은혜뿐인 것이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빈번하게 주를 거역하는지,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5).”
가족들이 필리핀에 갔다. 모처럼 다들 함께 가는 여정이니 그 일정이 주의 은혜 가운데 풍성하기를 바랐다. 저마다 이런저런 사연은 있고, 믿는 자로서 우리의 사연은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한다. 스스로 무장하지 않는다. 애씀으로 이를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는 주의 은혜뿐이라.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게 무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그러하여 나는 서러워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은근히 마음을 쓰고 늙으신 부모는 같이 못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지만 굳이 나는 서럽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받아들임으로 그 자체가 감사가 되기도 한다. 시편의 오늘 기도를 그리 읽는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주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나는 순금 같이 나온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성경의 고백은 나의 가는 길을 제시하신다. 생각처럼 그리 슬프거나 서럽지 않다. 오히려 오겠다던 아이가 역시나 오지 않았고 너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문자로 보내와 그것이 섭섭하였다. 또는 아이의 온전치 못한 정신과 마음이 그 마음을 휘두르는 것이 속상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주가 하시는 일이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내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생각을 버린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신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6-7).” 그 목적은 뚜렷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곧 우리의 구원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 1:8).” 말씀 가운데 승복한다는 것은 주를 온전히 바람이고 주를 바란다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하는 고백으로 드려진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시 26:3-4).” 그러므로 허망한 사람과 앉지 않고 간사한 사람과 동행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삶의 자세이다. 막연한 느낌이나 굳은 각오가 아니다. 다른 것으로는 구원이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이를 바로 알 때 주를 온전히 바란다. 그러느라 말씀 가운데 선다. 이는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시 26:5).” 결연함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드러나는 일이겠다. 공연히 마음 쓰고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고 둘 건 둔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노여워하지도 않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주가 행하신다. 다만 나는 그 일을 목전에서 증인이 되는 것뿐이다.
괜히들 걱정하고 염려하고 안쓰러워할까봐 안 그렇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만 바라보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리 행하신 것은 단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길은 없다. 더 나은 방법도 없다. 오히려 나의 생각은 온통 아이뿐이다. 도대체 ‘저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어찌 해야 하나? 그대로 두자니 마음이 어렵고, 뭐라 하자니 소용이 없고, 외면하고 포기하자니 더는 손 쓸 길이 없을 것 같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1-2).” 주께로부터 복을 받음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어떠하든 우리는 주의 영광을 기림이다. 그러므로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그리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인품이나 덕이 아니라, 그 값은 엄청났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그러니 말씀은 자꾸 내 문제가 아니라 저 아이의 일을, 저 아이의 일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2:10).” 마땅히 그리 행하는 결과였다. 실은 아이가 싫은데, 그런저런 변명과 이유로 이어지는 막무가내인 아이의 태도가 마땅치가 않는데도, 아 나는 나의 혀를 길들일 수가 없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내 의지로는 저 애를 계속 사랑할 수 없다. 만나기도 싫다. 보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그럼에도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9-10).” 나는 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애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봐주기가 어렵다.
나는 내 일로 마음 쓰기보다 저 애 일로 마음 쓰고 있는 내 자신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려니 하고 말면 그만인 일을 두고 이처럼 마음이 갈리는 것을 보면서 이 마음 또한 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다. 영적인 존재로의 사람이 아니면 동물이나 다를 게 없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6).” 그런 이가 있고 이를 거부하여 스스로 사람이 된 짐승도 있다. 별 수 없는 마음을 고이 접어두면서 생각이 많다. 억지로 될 일이 아니다. 나도 저 애도, 우리 일도 앞으로의 일도, 모두가 주의 것이라. 그러므로 다만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시 26:7).” 나는 저에게 또는 나에게 주께 감사하는 소리를 들려주고 주의 기이하신 일을 말할 따름이다. 듣거나 말거나, 외면하거나 부정하거나, 내가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다만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8-9).” 주께 아뢸 뿐이다.
다만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