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기 3:26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31:14
욥의 한탄과 비애가 먹먹하다. ‘~하였더라면’ 하면서 이어지는 저의 비관과 낙담이 절절하다. 읽고 있다 보니 민망하기도 하다. 어쩌면 친구들이 찾아와 그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혼자 있을 땐 차라리 스스로 다짐하며 잘도 이겨내는 것 같더니, 그런 거 보면 말이란 듣는 이의 것으로 저들로 인해 빚어진다. 설 명절을 앞두고 나는 왁자한 사람들 무리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토요일에 성경공부로 오는 친구가 ‘잡채가 먹고 싶어요.’ 하는 말에 장도 볼 겸 모처럼 대형마트에 갔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주차장은 줄지어 늘어선 차들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진 공원 주차장에 세우고는 한참을 걸었다. 그래봐야 와글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금세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혼자인 저 친구는 그마저 보육원 친구도 만나러 가지 않았다고 문자를 했다. 그러면서 누구는 누구를 부러워하고 누구는 무엇을 ‘~하였더라면’ 하고 한탄한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 3:26).” 하는 욥의 절규는 아담 이래로 죄의 굴레로 사는 사람들의 숙명이 아니겠나? 저마다 서로를 부러워하지만 것도 부질없는 것이어서, 한나절 마트를 다녀온 게 내게는 큰일이라 집에 돌아오자 그만 녹초가 되었다. 산은 산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고통은 쉼이 없었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기도는 마음에 큰 위로가 된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 31:14).” 결국은 혼자 걸어서 공원 주차장으로 먼저 오고, 아내와 딸애는 근처에 있는 더 큰 쇼핑몰을 둘러보고 오는 동안 서로가 다들 사는 게 고역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할 때 정작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19).” 오히려 두려움과 고통으로 주의 은혜를 한껏 누리는 셈이다.
한산한 공원 주차장에 앉아 온순한 겨울 날씨에 심신이 노곤하였다. 오전에 온 친구의 안부 문자에 뒤늦은 답을 하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인사치레를 안 하고 안 받는 게 편해졌다. 그런 때마다 새삼 안부를 묻고, 복을 빌고, 평소에는 그다지 마음도 두고 살지 않으면서 새삼 서로의 일을 궁금해 하는 일 따위에 싫증이 난다. 그럴 때마다 그러는 거 아니라고 아내는 타박을 하지만, 선생에게는 물론 가르치며 정든 아이들에게도 새삼 연락을 하거나 어찌 지내는지, 묻고 답하고 그러다 도로 잊힌 채 살아가는 것이 싫다. 애써 마음 쓸 일이 안 그래도 많은데 새삼스럽게 그러는 것이, 그게 그래도 사람 사는 정이지! 하는 아내의 핀잔에도 그저 성가실 따름이다. 당장 내 몸이 힘에 겹다. 내 곁에 두신 아이들이나 일이나 생각하고 돌보아야 하는 것들로도 벅차다. 잊힐만하면 잊힌 채 사는 것도 자유롭다. 굳이 연락하고 찾아가고 그때마다 빈손 보이지 않으려고 무리를 해가면서… 물론 나의 이런 생각이 옳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다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애써 외로움을 또는 슬픔을 벗어나려 할 거 없다. 그때가 곧 기회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이다. 오늘 시편은 그리 전한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1:23).” 다소 염세적이고 퇴락한 나의 태도나 생각을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도 또한 주를 만날 만한 때인 것으로 삼는 게 더 큰 복이다.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다가 말로만 문득 안부를 묻고 새삼 서로의 사연을 늘어놓으며 잠시 얽히는 것이 그래도 사람 사는 정이라고 하는 데는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니 좀 나아졌는가? 나는 오늘 욥의 절규가 나는 그리 읽힌다. 또한 시편의 음성도 그리 들린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어디서 읽은 시의 한 대목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들면 지옥이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란 참으로 부질없다.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하고 친구나 선생을 따르며 젊음을 누볐던 사람이라, 지금의 이와 같은 마음이 비관처럼 들릴 수 있겠으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누구나 오늘의 자신에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를 마주해야 한다. 가족을 건사하고 친구를 찾고 누구를 돌보느라 그럴 겨를이 없는 것은 다복함이 아니라 오히려 고욕이다. 그러다 우리 생의 욥과 같은 시간을 만났을 때 아뿔싸 어제만 해도 굳건할 줄 알았던 저의 결의와 다짐은 멀찍이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져 ‘~하였더라면’ 하고 절규한다. 그런 셈이다. 사람 믿을 거 없다. 자신도 믿을 수 없다. 나는 나를 가장 믿지 못한다. 비관이 아니라 실제다. 혼자인 친구가 외로움을 토로하며 명절 연휴에 혼자 일어나 먹을 게 없어서 냉동실에 있던 오리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말에, 속상하면서도 태연하였다. 뭐라 대꾸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들 그러고 산다. 혼자이면 혼자여서 여럿이면 여럿 가운데서, 이는 마치 비밀히 친 그물 같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시 31:4).”
사는 날 동안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바란다. 찾을 만한 때이다. 만날 만한 때이다. 일어나자마자 아이의 묵상글에 가서 어제는 좀 어땠는지 읽고 마음이 좋지 않아 주를 바란다. 온통 속상한 것뿐인 세상이다. 누구 때문에도 나 때문에도 ‘~하였더라면’ 하는 것들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할 때 나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사람 사는 게 그러는 거 아냐! 하는 아내의 핀잔이 그런 뜻일까? 그럼에도 다들 기를 쓰고 도로로 기어 나와 가족을 찾고 서로를 찾는 일에 대하여 굳이 그럴 거 없다고 본다. 평소에 잘 하고 있을 때 잘하는 게 상책이다. 뜬금없이 안부를 묻고 누구는 어떻게 지낸데? 하고 서로의 소식을 전해 들은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6).” 그렇듯 서로의 마음이 성가실 때가 있다. 허탄할 뿐이다. 토요일에 올 수 있겠니? 하고 성경공부 오는 친구에게 묻자, 그럼요! 하길래 그럼 됐다, 하고 잡채를 사고 전을 사고 소화 잘 되게 애채죽도 샀다. 됐지 뭐!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마음이 가야 몸도 가는 것이지 몸만 가고 오는 길은 멀기만 하여 고단하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어쩌면 나의 이런 마음이 이율배반적이라 어찌 서술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서로를 돌보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게 주 안에서다. 주 안에서란 주시는 바 오늘의 상황에서 내가 네게, 네가 내게 기우는 마음의 정도로 가늠할 수 있다. 나는 반갑게 안부를 묻고 몇 개월 만에 어찌 지내는지 묻는, 설 잘 쇠라고 인사를 건네는 친구보다 설날 당일인데도 오늘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에게 더 마음이 기운다. 엄밀하게는 저 때문에 마트에 갔다. 형식적인 안부보다 같이 식탁을 하고 함께 기도를 할 수 있는 오늘의 내 곁의 사람들이 소중한 것이다.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시는 데서 나는 나의 마음조차 밀어낸다. 개중에 가장 또 믿기 어려운 게 나의 마음이지 않았던가? 나의 젊은 날을 탕진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전부다 마음 때문이다. 이제는 심어진 말씀이 아니면 하등에 쓸모도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나는 이제 말씀이 어느 구절, 어느 대목이어도 모두 내 이야기로 들린다. 그리니 그 적용의 범위는 무궁하다. 설날이니 명절이니 하는 의미는 사람이 사는 데 다하지 못하는 정 때문이고, 모 커피 브랜드 점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그 문양과 그림의 유래를 찾아보니 ‘유혹하고 끌러 들이다.’의 의미를 가진 어느 여신이었다는 데서 기겁을 한다. 아무 의식도 없이 우리는 그 여신에게 입을 맞추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게 아닌가? 그런 설명을 잠깐 했더니 아내의 말이 일품이다. 그런 거 보면, 이 땅에서 잘 살려면 사탄과 결탁하는 수밖에 없나봐! 문화니 예술이니 속된 말로 돈을 끌어 모으는 모든 것들은 다 우상숭배와 결탁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게, 볼 때마다 저 여인의 문양이 께름칙하다 했는데 역시나 그런 유래가 있고 버젓이 우리는 입맞춤을 하면서 커피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도 사람들로 바글거려 나는 금세 일어나 밖으로 나와야 했지만… 뭐 꼭 그렇게까지! 하고 무덤덤하게 굴던가, 주의를 기울여 오직 주만 바라던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우리의 마음도 그 사연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과 인연의 관계도, 부와 명예도 온통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헤어날 수 없는 문화가 있고 그러면서 은연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신을 숭상하는 사람들과 섞여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었으니! 그 가운데서 느껴야 하는 괴리감은 전적으로 믿는 자의 몫이겠나?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31:10).” 산다는 일은 점점 쇠하는 일이라, 모든 게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이 모두 부당하지만은 않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14).” 그러하기를. 오늘 설 당일에 평소처럼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 마음이 기울고 뭐라도 하려 하는 나의 수고에 대한 가치를 위해서도. 그리하여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19).”
그러므로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23).” 하면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