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욥기 5:7-8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시편 33:20
우리의 영혼은 주를 바라고 우리의 육신은 세상을 좇는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온전하게 주를 믿고 바란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내 곁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교회로 오는 길이 왜 그처럼 멀고 힘든가했더니, 이는 마치 거울을 마주하는 일과 같아서… 평소에는 외면하고 살다 주일에 마주해야 하는 자신의 몰골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서는 다 괜찮다고 하는데 말씀 앞에 서려고 하면 거슬리는 게 있었으니, 우리 곁의 사람들과 우리가 추구하고 사는 일과 좋아하고 선호하는 바람들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갈래? 하고 사탄은 묻는다. 그래서 누구는 적당히 얼굴을 수건으로 두르고 될 수 있으면 영광을 마주하지 않는다. 또는 거리를 두거나 남 얘기하듯 손님으로나 온다. 것도 불편해지면 이에 타협할 수 있는 타종교를 갖거나 잠시 미뤄두듯 믿음을 다음으로 미룬다.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믿는 식구들이나 주변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믿음을 지키고 더욱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모두에게 외면당하거나 정신분열을 일으키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오늘 아침 말씀을 읽으면서 왜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길고 긴 훈계를 서술하였을까? 생각하다 저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7-8).” 안 그런가? 그래서 누구는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믿을 수 있는 길을 찾거나 짐짓 외면하거나 기어이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자기 길로 간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러 나이가 들고 또한 자식들을 낳고, 되로 받을 것을 말로 받는 셈이 되는 것이었으니! 아이들이 그처럼 몹쓸 무력증과 자기고집과 그 마비된 영혼으로 살아가는 데는 다 선대의 그릇된 판단과 선택 때문이었다. 나는 단언하건대 그리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고생을 위해 났다. 불 꽃 위로 날리는 재 같다. 그러니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다.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겠다. 하는 엘리바스의 말은 어느 지혜자의 말보다 현명하다. 이쯤 나이가 들고 보니 있어서 부러울 거 없고, 없어서 서러울 것도 없다. 있으니 좀 나은 인생인가? 것도 그만큼의 무게를 지고 사는 일이었다. 없으니 고달픈가? 것도 그 무게의 홀가분함도 있는 것이다. 예배 마치고 처가 쪽 식구 중에 누가 있는데 저의 부유함은 모두의 부러움이라서 소위 말해 상위 1%의 삶을 살고 있었다. 듣다보면 다들 돈으로 틀어쥐고 사는 인생이라.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데도 말하다보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로 사는 게 백 배는 더 감사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시 33:20).” 모르겠다, 나는. 속상하고 답답하고 그래서 주를 부르며 이리 뒤척거리고 저리 뒤척거리다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마음이 어려웠다.
그래서 더욱 주를 바람이여!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나는 아이가 예배에 올 수 없어서 우울하였다. 아이는 불안이 심해져서 전철을 탈 수 없었고, 누구는 안 믿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 해서 올 수 없었다. ‘아픈 아이’는 이모들과 같이 식사를 해야 해서 가지 말란다는 말에 얼른 와, 하고 단호하게 말했더니 간신히 왔다. 더는 뭐라 말할 게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열할 것까지는 없고, 그러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할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그 사랑,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만을 붙들 따름이다. 예수님의 ‘자기 사람들’을 내 곁에 두시는 것이라 이해한다.
저 아이들로 인해 내가 힘든 까닭은 그것이었다. 나는 오지 못한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그것까지도 행여 아이를 압박하는 것이 될까하여 입을 다물었다. 불안으로 인한 몸의 반응은 두려움 그 이상의 공포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제다.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다.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다. 그리 삼으시는 이의 뜻이 있을 테니까, 부디 아이의 가족들이 이를 계기로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를. 한사코 외면하고 저버리고 사는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두시는 고통인데 이를 신호로 깨닫지 못한다면 더 큰 멸망을 어쩌면 좋을까? 되로 받을 것을 말로 받는 것은 순전히 다음 세대의 몫인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지는 일이다. 당장 오늘에 겪는 일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와 같은 멸망을 없이 하시려고 오늘에 두시는 징계일 텐데!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곧 ‘자기 사람들’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오늘에 그와 같은 징계를 두신다. 이 또한 외면하고 거절한다면 더는 돌이킬 수가 없다. 예민한 문제이기는 하나, 나는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이 아이들이 겪는 오늘의 고통이 그 부모의 가벼이 여기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 본다. 이 또한 당사자인 아이들이 가벼이 여길 때, 이는 마치 악순환과 같아서 자신이 겪어야 할 일을 자식들이 짊어지게 하는 꼴이었으니! 다음 세대가 앓아야 하는 세상은 점점 더 고달프기만 하다. 아예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뭐라 이를 말이 없다. 저들이 그러면서 어디 타워펠리스에 살든, 떵떵거리며 상위 1%의 부를 누리며 만족함으로 살든, 나는 이제 부럽지가 않다. 도리어 우리에게 두시는 고통이 유익이라. 부디 아이가 이를 깊이 묵상하며 주를 더욱 바라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잠시 내 이야기를 하면 나야말로 괜찮았다. 적적하면 술을 찾고 담배로 위로를 얻으면서 멋대로 굴 듯 사람들을 마주하고 저들과 나란히 살던 날들이 당당했던 것 같다. 굳이 영혼의 문제로 속 끓일 것 없었고, 죄에 대해 나는 상관없이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것은 다들 그러고 살았으니까! 나의 양심은 마비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할 게 없었으니까! 지옥이 두려울 땐 외면하면 그만이고 천국이 멀게 느껴질 땐 한낱 종교가 갖는 망상이라 여기면 되었다. 내 곁에 모든 사람들이 잘만 그러고 살았다. 다들 그러는데 새삼스러운 것은 믿는다는 가족들이었고, 늘 가면 죄를 운운하는 교회였고, 쓸데없이 자책과 불안을 조성하는 것은 말씀이었다. 그러니 그때는 주일만 잘 넘기면 나머지 일주일은 거뜬히 멀쩡하였다. 길이 막히든 하늘이 무너지든 사람들이 고꾸라지든 나는 끄떡없이 잘 살고 있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내가 좋은 사람들과 내 곁의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고 살았고, 다들 사회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고, 저들과 어울릴 때면 만사가 속 편했으니까! 그러니 그게 과연 좋았나?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벌써 심판을 받은 사람들치고 너무 잘 사는 게 아닌가? 부러울 정도로 잘들 사는데 공연히 이러는 게 아닐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저들을 부러워하고 저들의 삶을 선호할 만도 하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4-5).” 잘들만 사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하는 것보다 궁상맞은 것이 어디 또 있겠나? 너나 잘 살아! 하는 소릴 들어도 싸다. 그러니 저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1).” 우리가 도리어 조롱거리가 된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12).” 그러니 어쩐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 나의 오늘의 수고와 믿음과 나름의 성결이 다 헛될 뿐이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4).” 이 땅의 삶으로는 가늠할 길이 없다.
나는 아이를 생각하며 속상하다. 하나님께 두고 서러워한다. 되레 더 잘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안 믿는 가족들의 본이 되게 하시기를 바라는데 그 꼴이 더 말이 아니니, 그럴 바엔 세상 어떤 방식과 이치를 따르는 게 현명하지 않겠나싶을 텐데.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 그러니 이 땅의 삶이 천년만년 영원한 것이면 모를까, 부러워할 가치도 없는 것인데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21).” 주께 아뢰고 고할 따름이다. 어떠하든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33:4).” 나는 오늘 말씀을 붙든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5).” 이를 아는 자는 젊은 사자가 먹잇감을 물고 빼앗기지 않는 것처럼 놓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6).”
부디 아이가 말씀으로 이겨내기를.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기를.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11).” 고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