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욥기 7:17-18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편 35:9
‘이생 너머의 초월적인 실재가 없다면 여기서 그 무엇도 가치나 의미가 없다.’ 흔히 ‘정상적이지 못한’ 사고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한들, 도대체 이러고 있는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허허로울 때가 있다. 아침에 아이가 왔다 가고 두 시에 아이가 왔다. 한 아이는 이렇고 한 아이는 저렇다. 각각 서로 다른 개체이면서 같은 것은 언제나 자기 생각으로 뭉쳐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누군들 아니 그렇겠나? 한 아이의 엄마는 젊을 때 믿었다가 교회 밖으로 나갔고, 한 아이의 엄마는 교회에는 있으나 밖에 있는 이와 다를 바 없이 위로를 얻지 못하였다. 탕자로 떠돌던 둘째나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도 내주하지 못하던 큰 아들이나…. 나는 차마 면밀하게 저들의 일상을 서술할 수는 없지만 문득 드는 생각이 이생 너머 초월적인 실재의 삶이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고 생각하였다. 고통 중에도 주를 바라며 의지하는 욥이나 다윗의 진술을 읽으면서, 나는 그렇게 떠나 있는 자와 남아 있으나 안으로 들지 못하는 자의 동일한 어쩔 수 없음을 묵상하여 본다.
아, 그러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 욥의 진술은 허를 찌른다. 그런 우리가 무어라고 주께서 그리 마음에 두시고 계시는 것일까? 어제도 아이와 이야기하다 이러는 나의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데 놀라워했다. 난 얘가 싫은데 얘를 싫어할 수가 없다. 성가시고 귀찮고 막연하여 싫증도 나는데 그만둘 수가 없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두시는 주의 마음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러할 때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9).” 아이를 보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마음으로 즐거워한다. ‘~하시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나 희망 때문이 아니라 그리 이끌어 가시는 이의 마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데 아이가 같이 기도하고 아멘, 할 때에 느껴지는 어떤 기쁨에 대하여! 그러므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또한 자주 아이의 묵상 글 블러그에 들어가 저의 하루를 살피면서 부디 말씀으로 잘 견디고 주의 인도하심으로 그릇 행하는 자리에 들지 않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교회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먼저 나는 집에 있으면서도 만족함이 없던 큰 아들이기도 하였고 탕자로 집을 나갔다 돌아온 둘째이기도 하여서 조금은 안다. 먼저는 진지하게 하나님을 받아들이며 감정적으로 느낀다. 그러다 어른이 되고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며 회의를 갖는다. 막연하게 믿고 의지하였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민은 삽시간에 나의 의식을 잠식하였다. 감성이 이성에 밀려나는 순간이다. 현실의 무게를 느끼면서 어린아이 같은 환상적인 신앙을 버리고 현실적인 문제와 이성적인 판단으로 지난날 자신이 믿고 의지하였던 신앙을 유치하게 여긴다. 또는 선을 긋고 더는 허용하려들지 않는다. 이를 올바른 판단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교회 밖으로 나가거나,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하지 못한다.
이를 돌아보면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첫째는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에게는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생긴다 해도 안 믿는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과 기대가 깔려있었다. 둘째, ‘안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보다 어리석고 비양심적이며 불량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거꾸로 보면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보다 의롭고 양심적이고 책임감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하면서 이내 사람들로부터, 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실망하게 된다. 셋째, 그러다 성인이 되어 청소년시절의 제약들로부터 벗어나면서 ‘별 것도 아닌 것에 죄의식을 갖고 살았던 자신의 신앙’을 유치하게 여기게 된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버젓이 잘들 사는 세상에서 교회는 나를 억압하였고 두려움을 조성하였다고 판단하게 된다. 가령 술, 담배 문제도 그렇고 혼전관계, 혼외관계, 이혼과 같은 직접적인 문제에서 스스로의 판단을 따르게 된다. 넷째, 그러면서 사람과 사람, 일과 사람, 맡은 바 책임과 의무에 대한 기준이 바뀌고 그럴 때마다 모호한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실질적인 현실의 관계를 더 선호하게 된다. 이는 내가 가졌던 것이고 그래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 밖에서 맴돌았던 시절의 우상이었다.
물론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사람이 특별한 것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실존의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이다. 나는 두 시에 오는 아이와 이야기하다 저의 완고함 앞에 혀를 찼다. 어찌 감당이 안 된다. 그럼에도 아이가 아멘을 같이 하고 주기도문을 외우고(벌써 또 절반은 까먹었지만) 사도신경을 암송하겠다고 하니 그것으로 생겨나는 기쁨에 대하여 나는 내 안의 것인데도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이 모든 게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확신할 따름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성경은 지도하신다.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에 대하여,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내가 상대할 대적이 아님으로 두려워할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내 안에 알 수 없는 배짱이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하는 데서 새 힘을 얻는다(빌 1:27-28).
그러니까 내가 내게 두시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대적하고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가령 아이 엄마가 명절날 찾아온 자매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신세한탄의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아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으로 인해 괴로운 것이다. 힘이 들어 더욱 심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은 다 그래.’ 하고 말해주려다 아이도 벌써 스물넷이다. ‘네가 이해해.’ 하고 말해주려다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소린지! 그럼에도 분명한 확신은 <우리의 적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 이상의 짓은 할 수 없다.> 이는 욥을 정죄하던 사탄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다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고통은 이해 너머의 일이라 별 수 없다. 저 아이가 왜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지, 무력증에 빠졌는지, 장애를 가졌는지, 공황에 시달리는지 누가 감히 분석하고 일목요연하게 증명할 수 있겠나?
그러니 다만 우리의 기본은 내가 하등에 쓸모없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거나 존귀한 영광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사람으로 살거나 둘 중에 하나다. 교회 밖에 있거나 교회 안에 있거나 하나님이 그 속에 내주하지 않는 것이 동일하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치 하루 종일 예제 문제를 풀어가듯이 나는 아침에 오는 아이와 두 시에 오는 아이를 차례로 상대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답이 없다. 이생으로 모든 게 끝나는 이야기라면 굳이 애써 돌볼 것도 열심을 다해서 살 것도 없이 무가치하다. 온갖 의미들 가령 가족이니 사랑이니 인간의 존엄이니 하는 따위들이 이생의 것으로 전부이면 한낱 보도블럭 틈새에 껴서도 악착같이 살아나는 조뱅이풀과 다를 게 무언가? 그런들 그 생각이 무에 그리 존엄한가? 그리 여기는 인간의 통찰 때문이고 그와 같은 통찰은 생명 그 중심에 있는 영원의 시공간이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게 아니겠나? 이처럼 의미는 목적이 있고 중요성이 있다.
이와 같은 고난은 모두 목적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왜?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것으로 우리의 존재는 참으로 의미가 된다(빌 1:29-30). 무조건 의미 있는 생명은 없다.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의 중요성을 알 때에야 비로소 의미가 된다. 곧 의미 없는 생명들도 허다하다. 가정예배에서 같이 둘러앉아 빌립보서 첫 장을 읽으면서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우리가 입을 모아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부디 주의 영이 저들 안에 내주하여 임재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아니면 모든 게 허사라. 교회 안에 있든지 교회 밖에 있든지,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욥 7:1).” 믿는다고 나은 생은 없고 안 믿는다고 보다 나은 생도 없다. 이생의 자랑은 한낱 버려질 것들뿐이어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어쩔 것인가? 오늘 욥의 절규와 다윗의 절규가 나를 붙든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 그러므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9).” 고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