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욥기 8:1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편 36:7
서로의 관심은 다른 데 있고 그 자랑은 같을 수 없었다. 웬일로 친구가 전화를 하였다. 자식들 자랑에 자신의 취미활동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였다. 그러한 즐거움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겠다. 교회는 좀 다니는가? 하고 물었더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고는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달리 무슨 말을 더할까, 하여 듣기만 하다 끊었다. 조만간 한 번 들를게, 하고 인사하는 것을 굳이 그럴 거 없다고 답을 하였다. 아내에게 그리 말하였다 하니 나의 사회성을 운운하며 타박을 하였다. 완전히 서로 다른 길인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없어 말았다. 사촌의 사돈의 초상을 알리고 손위처남은 그곳을 찾았다. 그러는 것이 탐탁지 않아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더니 그러다 나의 초상 때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며 핀잔을 이었다. 이렇듯 말은 말을 낳고 이어지는 말의 무게는 그가 가는 길의 방향이었다.
오늘 빌닷의 말이 재밌다.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욥 8:11-12).” 곧 허망한 길을 좇는 인생의 덧없음을 이보다 훌륭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이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이다.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13-15).” 나는 어디가 아프고 정체된 삶처럼 나아지는 게 없는 듯한데, 친구는 또 무슨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그와 같은 도전이 저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처럼 아픈 데도 없었다. 늘 바삐 사방을 챙기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손위처남의 열심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러다 돌아보면 나는 또 그 자리인 것 같아서, 이게 맞나? 싶기도 하면서….
어제는 아이가 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설교 초안을 잡고 책장과 책상을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겼다. 등 뒤에 무슨 기계를 놓았는지, 옆 사무실 사람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가 너무 세세하게 들려서 벼르고 있던 일이다. 아내는 같이 하자고 늘 말하지만 쉬엄쉬엄 옮기고 하나하나 정리하는 일이 나는 싫지가 않다. 저들 말소리도 말소리지만 행여 아이의 말을 저들도 들을까하여 자리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거기다 가끔씩 담배냄새도 넘어오고는 하였으니. 그처럼 하루 종일 하나하나씩 조용히 옮기고 정리하다 물끄러미 앉아 본문을 찾아보고 관련 성경을 묵상하는 일은 즐거웠다. 즐거웠다는 표현이 어설프기는 하지만 괴로움이 주께 토로하는 시편 5편을 여러 번 읽고 연관되는 말씀이 기이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아무리 어떠하든지 살아야 한다! 올해가 주어졌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견뎌야 한다. 싫든 좋든 그것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래서 누구는 취미생활로 수심 26미터까지 프리잠수를 한다하고 올해 목표로는 40미터라면서… 저마다 견디는 방법과 살 길을 찾는 데는 뭐라 하겠나? 그러는 그에게 교회는 좀 다니나? 성경은 좀 아나? 하고 물을 때 저의 반응이 애걔 겨우 그런 것으로 되겠나싶은 반응이었으니 것도 그럴만하다. 성경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그것으로 위로를 삼고 말씀 붙들고 산다는 말을 저들은 알기나 하겠나? 그럼에도 우리는 주의 성품을 힘입어 산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아무리 말해도 저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적당히 모든 게 잘 될 때 굳이 누가 하나님을 찾으려하겠나? 전엔 무엇으로 위로를 삼더니 이번에는 잠수하는 이야기와 딸내미 출판사 차려준 이야기로 한껏 꽃을 피우고 있으니… 빌닷의 표현이 가히 명언이라!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욥 8:11-12).” 하는 일이 쉬 성과를 내고 그 자라는 게 눈에 띄게 즐거울 따름이니, 나의 말은 저의 귀에 들릴 리 없다. 그러면서 언제 오겠다고 하면 만나서 또 구구절절 이어질 저의 허무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이다. 뭘 굳이 일부러 찾아서 나눌 이야기까지는 아니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변개가 없으시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 15:29).” 또 그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사람이 아니심으로 미쁘시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즐거워하던 그 일이 이제는 허망할 따름인 것은, 그런들? 그게 그래서 영원하겠나?
하나님은 여러 번 반복하시면서 ‘내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 이유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럴 때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학자처럼 새겨듣고 지식인답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성숙한 어른답게 진중하게 들어야 할까?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그 즐거움은 어린아이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이와 같은 말씀보다 무서운 게 또 있겠나? 무모하고 한심하고 답답할 것이다. 친구의 한숨은 그런 의미였다. 넌 왜 그러고 있니? 하고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사람 같았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 41:8-9).” 오늘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다. 이는 만세 전에 택하셨다. 우리가 사는 바벨론 같은 이 땅에서 우리가 안주하며 잘 적응하고 사는 것을 성경은 옳게 여기지 않으신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 그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과의 동행연습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아침에 나로 하여금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시는 것이 복되다. 나는 나의 친구에게 또 우리 교회에 오가는 아이들에게, 누구에게 그 어떤 보람보다 이와 같은 연습과 훈련이 희망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수아 사람 빌닷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욥 8:20-22).”
이를 다윗은 찬양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왜냐하면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 그러므로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