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기 9:11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시편 37:3
사는 동안 주를 온전히 의지하며 동행한다는 것은 복이다. 그에 따른 동행연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의 길이 고달프기도 하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11).” 그러할 때의 고충에 대하여는 말할 게 없다. 왜 저러고 사나, 싶을 정도로 안타까울 뿐이다. 아이는 내주에 엄마가 무슨 큰 수술을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른다고 하였다. 가족들이 말해주지 않는다는데 그렇다고 열여덟 살 먹고 그저 몰라요, 하는 소리가 더 이상하였다. 그러자 아이의 퉁명스러운 말, 우리 가족은 원래 그래요! 아이의 시니컬한 대답이 오히려 안 됐고 답답하였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핍절된 것에 대하여는, <이방인>의 작가 까뮈가 말한 것과 같다. “모두 죽을 거라서 삶은 장난이 돼 버렸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를 두고 무얼 같이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하나님이 내 앞을 지나시고 내 앞에서 움직이시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삶에 대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오늘 시편의 말씀은 대비된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먹을거리로 삼으라는 말씀이 간략하면서도 신중하게 들린다. 흉년이 들면 애굽으로 가게 돼 있다. 그래도 아이는 사도신경을 외우고 주기도문을 외웠다. 꿈틀거리듯 아주 조금씩 또는 더디게 하려고 하는 것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웅얼거리듯 암송하게 되는 것이 평생을 붙드실 것을 나는 잘 안다. 어릴 때 성경암송대회에서 상을 타려고 외웠던 몇 장의 성경이 오늘에도 여전히 입에 붙어 중얼거릴 수 있는 나의 경험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려고 하니 다행이었다. 하긴 글방 오는 것 외에는 하는 게 없다고, 씻는 일도 거추장스러워하는 아이였으니. 사는 게 장난이 돼버린 아이에게, 사는 건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일이란!
그게 어찌 아이만의 잘못이겠나? 오전에 오는 아이와 같이 읽은 이사야서 5장에는 ‘여섯 가지의 화있을진저’를 나타내고 있었다. 첫째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경고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저 혼자 가지고도 더 가지려고 드는 오늘날의 실태를 나타내준다. 둘째는 쾌락주의에 대한 경고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먹고 마시고 노는 데 따른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고 사는 향락을 보여준다. 셋째는 의도적으로 죄를 끌어들이는 악독에 대한 경고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어쩌다 그런 게 아니라 거짓이 거짓을 낳고 그것을 모아 수레를 끌 정도이니 그 죄악을 단순히 실수로 보기에는 어렵다. 넷째, 지나친 도덕주의에 대한 경고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스스로 옳다 여기는 데 있어 그 모든 기준을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는 교만함의 극치겠다.
다섯째는 자기중심적인 가치에 대한 경고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요즘은 애고 어른이고 모두가 스스로 옳다 하는 기준으로 산다. 어릴 때는 그래도 뭔가 배우려고 하고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며 저를 본받으려고 하는 자세들이 있었다. 존경하는 인물을 하나씩 두고 저들의 말을 명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경향도 있었다. 한데 지금은,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도 스스로, 생각해보고, 그리 하든가 하겠다고 하니. 마지막 여섯째, 인위적인 가치에 대한 경고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수익을 내고 뭔가 이윤이 남는 일이면 돈 장사도 사람 장사도 서슴지 않는다. 이를 서로가 격려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다루며 도리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뒤따라 서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우리의 자유는 다른 데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우리 스스로가 이루어서 취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안 믿고 아예 거절하는 무리에 대하여는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러니 어쩌면 어정쩡하게 신앙을 가지고 살면 도리어 더 골치 아픈 게 됐다. 사는 게 장난인 세상에서 사는 일에 아무리 의미를 둔다 해도, 새로운 돈벌이 하나에 뒤바뀌고 어디 좋은 몫을 두고는 사족을 못 쓰는 형국이니, 나는 아이를 두고 여러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사회의 기형적인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뭐라 해도 소용이 없고 내가 울어버린다고 해도 감동을 하지도 않는다. 했던 말 또 하고 같은 이야기를 또 듣고 그 핑계가 그 변명 같은 아이의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알 수 없는 맹랑한 소리에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아이가 간신히 외워온 사도신경을 시작으로 성경을 읽고 내가 기도를 하고 같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가운데서 부디 주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을. 아무리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이라 해도,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무엇을 마음 두고 사는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나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 같은 말씀을 들고 아이와 마주한다. 매일 오게 하는 것이 벅차서 일주일에 두 번으로 줄였으나 그마저도 입에 모래를 머금고 있는 일처럼 퍽퍽하기만 하여, 그때마다 그만둬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시 99:1).” 주가 움직이실 것을. 나는 그 작은 변화를 아이가 꼼지락거리며 외워온 사도신경에서 또는 함께 더듬거리며 외우는 주기도문에서 근거로 삼았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꾸역꾸역이나마 먹이고 또 들려주는 일이 내 할 일이겠다. 특히 오전에 오는 아이와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아이의 질문은 황망하고 그 이해는 맹랑하여 일일이 듣고 답을 하려면 이어지는 게 동문서답뿐이다.
그럼에도 하고 할 수밖에 없고 함으로써 유익한 것은 이처럼 그 말씀을 내게 두시는 것이다. 나는 이를 근거로 저 아이들에게 또한 결코 버려지는 말씀이 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사 48:21).” 고달프고 어려운 일인 것만 같아도 그러는 가운데서 주의 돌보심과 인자하심을 목격한다. 이를 거절하면 별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야말로 신기한 것은 오전에 오는 아이나 오후에 오는 아이가 마다하지 않고 그래도 나온다는 게 기적인 것이다. 무슨 재미가 있겠나? 그렇다고 하려는 의지가 있기나 하나? 이에 모두는 주의 이끄심이다. 나는 그리 이해하지 않으면 나의 하루하루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57:19).”
주가 하신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또 들어앉아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남들이 보면 무슨 대단한 일인가 싶겠으나 나는 한두 명이 오든 수천 명이 오든 그에 앞서 말씀이 나를 먼저 주관하심을 목격하고 체험한다. 아이와 읽은 말씀이 종일 나를 붙드셨던 것이고 그것이 모아져 한 주일의 설교 재료가 된다. 그러니 내가 어디를 함부로 싸돌아다니지 않고 누구를 아무나 만나대지 못하고 사는 것이 특별함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를 내 곁의 한 영혼에게 전달하게 하시려고!
나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항상 그리 여기고 생각한다. 내가 한 것은 없고 한 것도 보잘것없는 것이겠으나, 나의 그와 같은 사소함에서도 부디 주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오늘 아침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다들 혈안이 되어 있는, 장난이 돼버린 생에 대하여, 나는 다만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주가 내 안에 두시는 소원이고 주가 이루어 가실 소원이다. 그러므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6).”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겠나?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23-24).” 주가 붙드심이라.
이에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