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기 10:2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38:9
사는 게 불안하기 그지없다. 신종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쓸고 있고 미국은 그 외에도 인플루엔자로 수만 명이 독감에 걸리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하루하루 그 날의 무탈함을 감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의 말처럼 자신이 서른이 되기 전에 빙하가 다 녹을 것이라면서, 그러니 까뮈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으로 사는 게 장난이 되어버린 셈이다. 중국 우한에서 수백 명의 교민을 진천과 아산에 격리 수용하면서 이뤄지는 수송 차량의 행렬을 보면서, 하루만에 배나 곱절로 오르는 마스크 품귀 현상 앞에서 나는 더럭 두려움이 앞선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0-12).”
그러한 현상 앞에 나는 과연 굳건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8).” 그렇듯 두려움이 가중되고는 하였다. 당장 내 일이 아니니까 ‘설마’ 하고 ‘혹시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굴다가도 문득 두려움이 엄습할 때는 속수무책이라. 오늘 욥기서와 시편의 진술이 모두 동일하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0:2).” 나의 이 두려움과 고난을 주께 아뢰는 길밖에!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우리의 안일함은 사는 것을 장난으로 여기게 하나 이와 같은 어려움이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일이었으니, 어제도 이사야서에서 찾아보았던 여섯 가지의 ‘화있을진저’에 따른 경고를 묵상하게 된다. 이는 두 번째의 쾌락주의에 대한 경고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11).” 그저 몸이 원하는 바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 오늘의 내가 나로 주 앞에 서서 주께 아뢰고 주를 의뢰하게 되는 일이 기적이기만 하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전에는 내가 다르지 않아서 까뮈의 말처럼 사는 게 장난 같았다. 아이가 대수롭지 않은 듯 까짓것 뭐, 서른 전에 죽을 거예요! 하는 맹랑한 소리와 다를 게 없다. 시집 안 갈 거예요, 자식 안 낳을 거예요, 나는 동성애자예요, 곧 스물이 되면 몸에 문신을 하고 담배를 피울 거예요, 하는 따위의 말들을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한다. 뭐라 한들 그 말에 취해서 그 말이 곧 의젓함으로 둔갑한 것일 뿐인데! 우리는 도리어 환난에도 기뻐하는 것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는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리와 난리 더 큰 소문이 이어지겠으나 그로 인해 사람들이 요동치고 온 세계가 몸살을 앓게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나는 어제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 도리어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은혜밖에는 답이 없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12).” 주께서 나를 은혜로 호위하실 것이다. 단지 동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나를 만나신다. 나를 호위하시고 보호하시고 자기의 눈동자처럼 지키신다. 같은 어려움과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있으나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38:15).” 우리는 그러하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22)
오직 주 앞에 외에는 다른 데 하소연할 데가 없다. 덩달아 낄낄거리며 장난으로 여기던가, 그래서 완고하여져 더욱 고집불통이 되던가, 세상은 요지경인 가운데서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 13:15).” 그럼에도 여전히 으르렁거리며 이 틈을 이용해서 먹잇감을 구하듯 사재기를 하던가, 값을 올려 매점매석을 일삼으며 폭리를 취하든가,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4-25).”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 줄 아는 것이 복이었다. 때로는 실의에 빠지고 낙심이 오고 괜한 슬픔과 짜증에 겨울 때도 있다. 가령 늘 먹는 일에 부실하여 죽을 사놓고 계란말이까지 하여 점심 겸 간식으로 먹으라고 아내가 밤늦게 준비해두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 다섯 시를 넘겨 문자가 들어왔는데, 이제 집에 들어와 씻고 자니 못 온다는 것이다. 퇴사를 앞두고 새로운 곳에 입사를 보장받으면서 누굴 만났는지, 어떤 술자리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제 저녁 전화를 하여 주절거리는 것을 일찍 들어가 자라고 했는데….
그럴 때면 누구를 위하여 하는 일인가 싶어져 괜히 심통도 난다. 애는 애여서 그렇다지만 다 알만한 것이 그러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럴 때마다 은근히 속상하고 화가 나는 일이기는 하다. 하긴 이렇게 연락이라도 먼저 해주면 또 양반이다. 대놓고 연락도 없이 사람을 기다리게 하다 한참이나 지나서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런저런 변명을 일삼을 때의 난감함이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그런 것일 테지만, 나는 덩그러니 식탁 위에 준비해둔 점심거리 때문에 공연히 더 화가 나기도 한다. 자, 그럴 때 무얼 붙들고 갈 것인가? 내가 얘를 어쩌나? 하고 내가 끌어안고 힘들어할 것인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사 5:12).” 그러는 것을 나는 그저 묵묵히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수밖에. 애는 애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다들 자기 멋대로 구는 세상에서 이와 같은 난리와 난리는 하염없기만 하니, 죄가 끈을 꼬아 수레를 끌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자랑하는 것이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어찌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나의 열심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라면 무던히 또 묵묵히 주만 보고 하는 수밖에. 말씀 붙들고 말씀만으로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그리하여 더는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고 나의 수고와 열심을 의지하지 않으며 어떤 희망도 기대도 모두 주께 두어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말씀으로 의지하는 길밖에! 곧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욥 10:1).” 이를 주께만 아뢰는 것,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오직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5).”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난리와 난리 소문과 소문이 끊이지 않고 우리를 두려움 중에 몰아세우는 때에,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21).”
그러므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 아멘.